매일신문

[구미가 품은 인물 꽃으로 피다] <9>분열과 대립을 넘어선 여헌 장현광

한평생을 易學 연구에 몰두…인조 9년에 '우주설' 완성

구미시 인의동에 있는 장현광이 살던 조선 후기 가옥인 모원당.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가옥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거처할 곳이 없자, 문인 장경우를 비롯한 문도와 친척들이 협력해 1606년에 건립했다.
구미시 인의동에 있는 장현광이 살던 조선 후기 가옥인 모원당.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가옥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거처할 곳이 없자, 문인 장경우를 비롯한 문도와 친척들이 협력해 1606년에 건립했다.
국립 과천과학관에 전시된 여헌 선생의 영정과 안내문.
국립 과천과학관에 전시된 여헌 선생의 영정과 안내문.
장현광 유허비각
장현광 유허비각
여헌 장현광(1554~1637) 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연구
여헌 장현광(1554~1637) 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연구'전시'교육을 통해 구미 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문화체험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한 여헌기념관이 2014년 3월 구미시 임수동에 문을 열었다.

여헌 장현광(1554~1637)은 독창적인 성리사상을 제기했던 17세기 전반기의 유학자였다. 조선 유학을 선도한 인물로서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더불어 한국 유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좁게는 구미'선산권 사림파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넓게는 영남학파의 전통 속에 놓여 있다.

그가 제안한 경위(經緯)에 기반한 성리설은 한국 유학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학문 목표의 실현을 위해 주자학을 받아들이되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으며, 또한 당시 영남학파의 분열과 대립을 넘어서서 자신의 학문 세계를 정립한 인물이다. 왜란과 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큰 전란과 반정 등으로 혼란에 빠진 시대였다.

도덕적인 선을 근본으로 하는 유가적인 가치관을 확립함으로써 그 시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의 방대한 학문 체계는 조선 유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현대 과학자들에 의해 조선 중기 유일한 과학 사상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온 마음이 우주에서 놀던 아이

유유한 낙동강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기름진 들을 펼쳐놓은 곳, 그 끝으로 아담한 산봉우리가 봉긋 맺어 있었다. 경상북도 인동현의 옥산은 인동 장씨의 관향을 상징하는 산이었다. 어느 날, 불로초로 불리는 귀한 영지가 옥산의 신령스러움을 깨우며 홀연히 피었다. 사람의 눈에 좀처럼 띄지 않는 귀한 식물의 등장에 반드시 큰 인물이 날 것이라며 확신하는 사람들의 기대가 높았다.

명종 9년(1554)에 인동현(仁同縣) 인선방(仁善坊) 남산(南山)의 몸채 뜰에서 자줏빛 상서로운 기운이 떠오르더니 아기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고려(高麗)의 상장군(上將軍) 장금용(張金用)의 후손이며 덕녕부윤(德寧府尹) 장안세(張安世)의 8대손(八代孫)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탄생이었다.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에 추증된 장열(張烈)이며, 어머니는 경산 이씨(京山李氏)로 제릉참봉(齊陵參奉) 이팽석(李彭錫)의 딸이었다.

현광은 7세 때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벌써 글자를 모아 글귀를 만들 정도로 영리하였다. 8세에 부친이 돌아가셨다. 총명한 아이를 그냥 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아들 현광을 그의 자형인 송암 노수함의 문하로 보냈다. 하루는 신당 정붕의 아들이자 송당 박영의 제자인 정각이 친구인 송암의 집을 방문했다. 스승과 학문을 나누고 있는 어린 현광을 지켜보며 그 학문의 깊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수려한 얼굴과 바른 자세까지 더하니 정각의 온 마음이 그 아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온종일 세상을 비추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 때쯤 하루의 공부를 마무리하려는 듯 현광은 책을 덮었다. 저물어 가는 해를 보고 스승인 송암에게 말을 이었다.

"스승님, 해는 동쪽 하늘로 솟아올라 서산으로 지는 것이 옵지요?"

어린 제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몹시 궁금한 송암은 고개를 끄떡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분명 서산을 넘어갔는데 매일 아침 동쪽에서 떠오르니 그것이 참 이상하옵니다."

생각지도 못한 제자의 질문에 송암은 머뭇거렸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정각은 어린아이의 마음이 우주에서 놀고 있는 사실에 감탄하였다. 그러다가 장난기가 발동하여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태껏 네가 한 번도 못 봤구나! 어젯밤에도 해가 검은 보자기를 쓰고 별빛을 헤치며 동쪽 하늘로 막 굴러가던데."

정각은 농을 쳐놓고 아이의 반응을 살피며 크게 웃었다. 송암은 벗의 행동에서 아이로 향한 무한한 관심이 서려있음을 직감했다.

"이 사람 언제 왔는가?"

"내 진즉에 와서 쭉 지켜보고 있었네. 이런 영특한 아이는 처음 보았네그려. 이 아이는 기상이 굉위(宏偉)하여 반드시 세상에서 특출한 사람이 될 것이네. 내 무엇이든 저 아이에게 주고 싶은데 무엇을 줘야 할까?"

이튿날 아침 송암의 집 마당으로 말 한 필이 들어왔다. 정각이 자신의 애마를 현광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현광은 지나친 선물을 받을 수 없다며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500년 만에 한 번 나는 큰 인물

그의 학문은 열정으로 치달았다. 자형인 송암에게서 사서와 삼경을 익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현광의 나이 13세였다. 벼슬보다는 대학자를 꿈꾸던 그는 유교 철학에 도통한 학거 장순을 스승으로 주역과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스승의 책상에 있는 성리대전을 보았다. 송나라 때의 성리학자 120명의 학설을 모은 책이었다.

현광은 그 가운데 있는 황극경세(皇極經世) 편을 보고 호기심이 났다. 수학의 이론이나 이치로 천지 만물의 변화를 설명하는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책이었다. 침식을 잊고 몇 날 며칠을 탐독하여 그 내용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니 희열을 느꼈다. 스승과 하직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스승을 찾지 않고 독학으로 학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은 20세 전후에 완숙 단계에 이르렀다. 18세에는 공부한 것을 종합하고 포괄하여 앞으로 학문할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것은 우주의 중요한 모든 것을 한데 묶은 우주요괄(宇宙要括) 10첩이었다. 한평생 학문할 계획의 범위가 매우 넓고 그 목표가 높았다. 그의 최종 목표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사업을 하여 천하에서 제일가는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이 천지 사이에 태어나서 우주 간의 사업을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로 삼아야지 자기의 한몸이나 눈앞의 일에만 매달려서는 안 되며 또 하루나 한 해나 한 시대에만 하고 마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면서 언제나 우주사업을 꿈꾸었다. 한평생을 그런 마음가짐으로 공부했기에 위대한 학자로서 후세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인조대왕은 그에게 내린 제문에서 "500년 만에 한 번 나는 큰 인물"이라고 하였다.

◆도에 바탕을 둔 학문

몹시 더운 여름철에는 어려운 경서 공부를 잠시 접어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옛 글이나 시를 짓는 대회가 자주 열렸다. 21세의 현광은 청도에서 열리는 하과에 참석하였다. 시험 제목이 '구름 걷힌 푸른 하늘을 보다'인데 이는 공자의 수제자 안회가 세운 뜻이 맑고 상쾌한 푸른 하늘과 같다는 것에 비유한 것이었다. 그의 저술 가운데 "하늘을 보기만 하고 하늘에 이르지는 못했구나"라며 32세에 요절한 안회를 안타까워하는 구절이 있었다. 고관들이 "이런 명구는 예사 선비로서는 할 수 없다"라며 몹시 감탄하여 높은 점수를 주었다.

선조 9년(1576) 조정에서는 각 고을에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젊은이를 추천하라고 했다. 23세의 현광이 인동 고을에서 추천되었다. 성주목사 허잠(許潛)이 어느 날, 한강 정구(鄭逑)에게 남중에 호학(好學)하는 선비가 누구냐고 물었다. "공자의 삼천 명이나 되는 제자 중에도 안자 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기는 해도 장현광이 후일 우리의 사표(師表)가 될 것입니다"라고 한강이 답했다. 그 예견은 빗나가지 않았다. 선조 14년(1581) 28세에 지방에서 실시하는 향시에 합격하고 30세 봄에는 향시 별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이 없었고 오로지 학문 탐구에만 마음을 쏟았다. 그의 학문은 도(道)에 그 바탕을 두었다. "도는 높고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의 타고난 본성을 따라 일상생활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이에 바르게 시행할 뿐이다"고 하였다. 효'제'충'신을 순리대로 실행하는 것이 도이고, 인'의'예'지를 닦는 것이 도임을 강조한 현광은 시 한 편에도 도가 담겨 있고, 논(論), 서(序), 설(說) 등 모든 영역이 도에 바탕을 두고 서술되었다.

또한, 학문의 폭이 넓고 심오하였다. 유학 경전은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이나 이단으로 배척되던 노불(老佛)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비평과 수용의 대상으로 삼았다.

◆독창적인 학문으로 현대 과학자들에 의해 재평가

그는 독특한 성리설을 주장하였다. 조선 500년 동안 거의 모든 성리학자가 이기(理氣)를 논함에 있어 사람은 이(理)에, 말은 기(氣)에 비유하는 송대(宋代)의 인마설(人馬說)을 따랐으나, 이를 배격하고 이는 경(經), 기는 위(緯)에 비유하는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을 주창하였다.

이 이론을 누구나 알기 쉽게 베 짜는 데 비유하였다. 원래 하나인 실을 세로로 사용하면 날실(經)이 되고 가로로 사용하면 씨실(緯)이 되어 베(道)라는 것이 된다. 날(經)은 이(理)로 체(體)가 되고, 씨(緯)는 기(氣)로 용(用)이 된다. 날실과 씨실의 교호작용(交互作用)에 의해서 베가 짜이듯이 이(理)와 기(氣)가 상호작용(相互作用)하여 도(道)가 생성(生成)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하나 되는 분합이론(分合理論)이다. 인마설(人馬說)은 애초에 사람과 말은 둘이었으며, 사람이 말을 탄다 해도 말은 말, 사람은 사람이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가 둘, 둘이 하나 되는 분합이론이 성립될 수 없음이 인마설을 배격하는 이유였다. 또한, 방대하고 심오한 역학을 집대성하였다. 한평생 역학 연구에 몰두하여 잘못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많은 학설을 종합 정리하였다. 자신의 견해를 첨가하여 역학도설(易學圖說) 9권을 완성하였다. 인조 9년 78세에는 우주설(宇宙說)을 저술하였다. "대지가 두텁고 무거우면서도 추락하지 않는 것은 하늘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가 쉬지 않고 빠르게 돌면서 대지를 떠받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 이론은 대지가 허공에 떠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이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현대 과학자들은 그의 우주설은 중국 송대 성리학자들의 논의를 훌쩍 뛰어넘어 세련되고 독창적인 것으로 재평가하였다. 과학기술을 전공한 자문위원회의 추천으로 그의 영정이 안내문과 함께 국립과천과학관에 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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