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100대의 피아노

'악기의 제왕'이라는 피아노가 '바다' 혹은 '강(江)'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얼핏 뜬구름 잡는 얘기인 것 같지만,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의외로 피아노와 바다'강이 친숙한 사례를 제법 찾을 수 있다.

전봉건 시인의 '피아노'(1980년)를 읽어보자.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시인은 여성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을 물고기의 신나는 유영으로 표현했다.

다음 연을 보자.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는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들었다.' 음악 속에 몰입한 시인은 물고기가 뛰어노는 바다 속에서 선율의 파도가 되어 함께 뛰어놀았다. 피아노가 주는 절절한 감동을 물고기와 파도를 통해 형상화한 것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1993년)에는 '바다'와 '파도'를 배경으로 피아노 치는 여자가 등장한다. 여주인공 에이미(홀리 헌터 분)가 고적한 바닷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영화사의 명장면 가운데 하나다. 에이미가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피아노를 치면 그 뒤로 하얀 파도가 부서지고, 딸은 모래밭에서 춤추며 뛰어놀고, 이웃집 남자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아름답고도 경이로운 장면이다. 피아노가 갖고 있는 위엄 있고 엄숙한 이미지가 자연의 원초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와 절묘하게 대비되면서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구에서도 피아노와 자연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행사가 있다. 10월 1'2일 화원동산 사문진 나루터에서 열리는 '달성 100대 피아노 콘서트'가 그것이다. 올해로 5회째를 맞지만, 이 축제를 볼 때마다 기획자의 탁월한 안목에 감탄한다. 이 축제는 1900년 미국인 선교사가 사문진 나루터를 통해 아내에게 줄 한국 최초의 피아노를 들여왔다는, 단순한 팩트 하나에서 출발했다. 피아노 100대를 동원하는 파격적인 발상과 수준 높은 프로그램으로 큰 인기를 얻었으니 '스토리텔링은 이런 것이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피아노 100대와 피아니스트 100명이 출연한다. 피아니스트들이 2박 3일 동안 합숙하며 연습했다고 하니 더욱 흥미롭다. 낙동강변에서 듣는 피아노 선율이 어떤 낭만을 자아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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