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길 위의 300문장

이숙경
이숙경

사지선다형처럼 화살표가 보인다. 좌회전, 우회전, 직진 아니면 유턴이라도 할까요? 날마다 길을 가다 보면 곳곳에서 충직한 화살표 일가를 만난다. 내가 가는 길은 두 군데 좌회전을 제외하고는 여지없이 직진으로 내닫는다. 하루 24시간의 두 시간을 그렇게 길 위에서 한 번은 떠나는 목적지를 향해, 한 번은 다시 돌아오는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그러다 보니 무심코 길 위에 버려지는 두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는 음악에 젖어 가거나 정지한 신호등 앞에서 짧은 시 한 편을 읽으며 삭막한 길 위의 시간을 잊으려 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니 그것도 무료해졌다. 그래서 사이버 연수를 선택해 제2외국어 300문장 외우기에 도전했다.

그런데 문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무려 30년이 지나다 보니 그때 익혔던 문장은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데 새롭게 만나는 낯선 문장은 외우기가 힘이 들었다. 그리고 결심과는 달리 날마다 지속적으로 그 일을 할 수가 없어 띄엄띄엄 하다 보니 계속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300문장 외우기를 마치고 며칠 전 시험을 치러 갔다. 시험 문제는 비어 있는 대화를 완성하거나 단어나 조사를 쓰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모의고사를 치면 100점을 맞은 적도 있었는데 100점은커녕 연수 이력에 최하 점수를 받게 되는 오점을 남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저녁에 돌아왔을 때 피로가 물때처럼 몰려와 밥도 거르고 혼곤한 잠에 빠졌다. 몸속의 모든 촉수가 곤두서 늘 얕은 잠을 자던 내가 사나흘 잘 잠을 한꺼번에 자고 말았다.

늦은 아침 일어나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시험의 잔재들을 정리했다. 사인펜을 연필꽂이에 꽂고 그동안 외웠던 책을 위대한 유산이라도 되는 양 쓰다듬으며 책장에 꽂았다. 하루에 한두 권씩 우편함에 책이 와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폐기해야 하지만 300문장의 책은 당분간 버리지 않을 것 같다.

책장에서 돌아서며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 쓴웃음을 지었다. 별수 없는 일이 내게도 나타나고 있다. 이제 시험을 치는 일은 삼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간신히 외웠던 문장의 유효기간은 대체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그 문장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빨리 여행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다시 먼 길 위에 서 있다. 한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하늘과 구름이 참 포근했다.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머리카락을 말끔히 손질하고 갔다. 어쩌면 도전이라는 말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말일지도 모른다. 도전이라고 생각했더니 성과가 나타나지 않게 되자 선택에 대한 안목에 실망을 하게 되었다.

앞으로 살아갈 많은 날들을 위해 어떤 것을 준비하여 더 열정적으로 살아야 할지 내가 누릴 참다운 자유를 궁리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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