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찾아간 날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어머니를 찾은 그날 저녁에 화를 당했다. 그에게는 아들과 여동생이 있었지만 오래전에 별세했다. 상황을 아는 사람이 없어 이웃의 얘기를 종합했다. 그분은 큰 목수였다. 부인과 어린 아들 김성우는 금호에 살았다. 박사리에는 어머니 은해달(뽕나무집 할매)이 있었다. 건축 솜씨가 뛰어나 집을 짓는 곳마다 뽑혀 다녔다. 공사 현장에 나가면 한두 달씩 걸렸다. 사건이 터진 날은 어머니를 뵈러 집에 들렀던 날이다. 오랜만에 집에 온 그를 보려고 친구 여럿이 놀러와 함께 놀았다. 같은 날 사망한 박일도 아재도 함께 변을 당했다.
"허구한 날 제쳐 놓고 하필이면 오늘 왜 왔노?"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방구들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면서 통곡했다.
이웃인 박영생 옹의 증언이다.
"망인은 일류 목수였지. 한 번씩 올 때마다 푸짐하게 음식을 장만하여 이웃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어.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 같애. 배고팠던 시절,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으니 고마움을 잊을 수 없어."
뽕나무집 할머니는 백 살까지 살았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아들 김승우는 나와는 절친한 친구였다. 아기일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재혼했다. 어려운 삶을 살다 중한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하직했다. 망인의 손자와 통화를 하였지만, 더는 들을 얘기가 없었다.
#5. 사망자 김재수 33세. 아들 김성우 2세. 이웃 주민, 박영생 박기정
생포한 공비를 향한 할머니의 절규
나이 어려 전혀 생각이 안 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가 전부야. 사건 하루 전, 아버지는 묘사 준비를 했어. 사건이 터지던 날, 영천 화산면에 있는 산소에서 묘사를 모시려고 계획을 잡았어. 신한동에 사는 친척 할아버지가 갑자기 별세하여 초상집에 갔지. 아버지는 장례 준비를 끝내고 주무시러 집에 내려왔어. 동사(洞舍)에서 마을 일을 의논하다, 공비들에게 끌려가 참변을 당했어. 그날 묘사를 지내러 영천에 갔더라면 화를 면했을 터인데. 그것도 팔자인가 봐. 이십 대에 홀로 된 어머니의 처절한 삶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어.
"마을에서도 살림이 탄탄했다고 하던데요?"
"그래, 맞아. 논과 밭이 많은 축에 들어갔지."
"농사는 누가 지었는지요?"
"하양으로 이사한 큰아버지께서 농번기마다 농사를 거들었어."
"공비에게 황소를 뺏겼다던데?"
"맞아, 놈들은 사건 전'후에 자주 괴롭혔어. 큰아버지가 대차오를 몰고 와 모내기를 위해 논갈이를 하고 있었지. 놈들은 큰아버지를 협박하여 황소를 뺏어갔어. 그들의 횡포는 한국전쟁이 터질 때까지 이어졌지. 멀쩡한 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슬픔은 극에 달했어. 생포한 공비 한 놈을 논 마당에서 공개 처형할 때, 아들의 원수를 갚겠다며 실신할 정도로 울부짖었대."
돌아가신 분의 어머니(사동 할머니)는 성격이 걸걸했다. 이름난 점술가였다. 몸이 아플 때, 할머니가 주술을 외며 환부를 어루만지면 아픈 곳이 귀신같이 사라지곤 했다. 부엌칼로 머리를 쓱쓱 빗긴 뒤, "사팔이 쉐!"라며 무당의 고유 언어로 고함을 지르며 사립문을 향하여 칼을 내던진다. 칼날이 밖으로 향할 때까지. 생포한 공비를 공개 처형할 때 할머니는 절규했다. 건장한 아들이 하룻밤 사이에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구경 나온 모든 유족은 함께 오열했다.
#6. 사망자 김천식 23세. 아들 김경암 3세
장가든 지 사흘 만에
작은아버지는 같은 마을에 장가들었어. 결혼한 지 사흘째야. 사건이 터진 날은 삼촌이 처가에서 우리 집에 오는 날이었지. 잔치 뒤끝이라 친척들이 모여 즐겁게 놀고 있었어. 갑자기 공비들이 들이닥친 거야. 아버지와 삼촌은 정미소 마당으로 끌려갔어. 삼촌은 현장에서 놈들의 칼을 맞고 바로 죽었어. 아버지는 여러 곳을 칼에 찔렸으나 목숨은 겨우 건졌어.
"하루아침에 청상이 된 숙모는요?"
"숙모는 여러 차례 재혼하라는 것을 뿌리치고, 칠 년 가까이 외로움을 달래며 독수공방했지."
"네 살 난 내 동생을 아들 삼겠다고 하면서. 입에 풀칠하기 어려워 서울로 이사했어. 동생은 숙모에게 몇 차례 드나들었어. 어느 날, '인제 그만 왔으면 좋겠다'는 눈치를 주었다더군. 새로운 배필이 생긴 모양이야.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잘 살기를 바라."
그녀의 삶을 조명하고자 지인을 통해 취재 요청을 하였지만, 완곡히 사양했다.
#7. 사망자 김태복 28세. 조카 김경식 10세
세 살 난 어린 딸을 두고
일본에 징용 간 삼촌은 돌아온 지 오래되지 않았어. 공비들은 작은아버지의 배를 열십자로 갈라놓았어.
"내장이 밖으로 쏟아져 시신 수습에 무척 힘들었다는 할아버지 말씀을 들었을 때 치가 떨리더군. 삼촌이 낳은 딸, 용자(당시 3세)는 우리 집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어. 어느 날, 재혼한 숙모가 데리고 갔는데 엄청스레 울더군. 사촌 여동생은 의붓아버지 아래서 자랐어. 성장한 과정은 잘 모르지만, 마음고생이 많았을 거야."
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어렵사리 그녀와 통화할 수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가 아닌 서울 말씨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세 살이었으니 아는 것이 전혀 없어요. 엄마에게 들은 것이 전부예요. 난리가 터지자 어머니는 갓난 남동생을 업고, 아버지는 나를 안고 밖으로 뛰쳐나왔어요. 공비들은 나는 팽개치고 아버지를 끌고 갔어요. 다른 분들도 처참하게 당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 참혹했어요. 내장이 송두리째 밖으로 나왔다 했으니. 동생도 이내 죽었어요."
"무슨 병에 걸렸는지요?"
"동생은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셔 죽었어요. 불 속에 뛰어들어 쌀 몇 되와 옷가지를 건지려다 아들을 죽였다며 엄마는 자주 한탄했어요."
"어머니는 어린 딸을 큰집에 두고 서울로 떠났다는 얘길 들었는데요?"
"제가 어릴 때 어머니는 재혼했어요. 초등학교 삼 학년까지 큰집에서 자랐어요.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기억이 뚜렷하지 않아요. 서울로 간 엄마를 기다리며 교실 밖에서 서성거린 것 같아요. 벼가 무르익을 무렵, 참새를 쫓으러 들판에 간 적이 더러 있어요. 얼마 후,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갔어요. 의붓아버지 밑에서 이복동생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아픈 기억을 건드리는 것 같아 더는 물을 수가 없었다.
#8. 사망자 김화은(김화언) 32세. 딸 김용자 3세. 조카 김상연
박기옥
1949년 경산 와촌 출생. 모리코트상사 대표. 현 경산문인협회 회장. 수필집 '고쳐 지은 제비집' '소금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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