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그가 너를 맘 아프게 해 너 혼자 울고 있는 걸 봤어'. 이 구절을 마음속으로 흥얼거려 본다면 어떤 가수의 멜로디가 떠오를지 모르겠다. 김경호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는가. 고교 시절, 벼락처럼 찾아온 그의 음악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기에 충분했다. 단지 김경호처럼 노래를 잘 부르고 싶었던 마음이 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훗날 내가 공연장에서 일하기까지의 원동력이 되었다.
록 음악에 빠진 채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 입학 후에도 학교 록 동아리에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 입학 후 군 휴학 전까지 나의 전공은 통계학과가 아니라 록 음악이었다. 서울 홍대 부근 클럽을 돌면서 밴드를 결성해 원 없이 노래를 부르며 록 스타 행세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동안만큼은 나는 프레디 머큐리, 로니 제임스 디오, 롭 핼포드였고, 그 어떤 록 보컬리스트가 부럽지 않았다.
그렇게 록만 좇다가 취업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나는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기업에 취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뒀다. 그때 당시는 철이 없었던 건지 겁이 없었던 건지 모르겠으나 유학을 통해 원대한 꿈을 이루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7살, 1여 년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그곳에서 결국 다짐했다. 공연장에서 일하기로 말이다. '내가 직접 무대에 서지 못한다면 공연을 기획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전공 학과를 선택할 때에도, 취직을 위해 공부를 할 때에도 언제나 선택 기준은 '남들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의 취직과 유학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했다.
이후의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공연장 대부분의 종사자들이 클래식, 무용, 연극 등 예체능 출신 위주인 이 업계의 특성상 인턴이나 아르바이트 자리조차도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다. 운 좋게 아르바이트로나마 일하게 된 첫 공연장에서 자존심이 상한 일도 많았다. 그러나 공연장에서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열심히 일할 만한 내적 동기가 충분했다. 이후 정식으로 공연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10년 가까이 이 분야에 몸담고 있다.
진로를 걱정하는 10대, 20대들이 많다. 한 번쯤 눈을 감고 자신에게 물어봤으면 좋겠다.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그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정답을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 정답을 묻다'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이 했던 말이다. "정상이라는 위치보다는 거기까지 가는 그 과정의 흔적이 나의 역사이기 때문에 묻지 말고 자기의 길을 시작해봐라! 나만의 정답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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