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제도 탓? 사람 탓?

한국외국어대(스페인어 전공) 졸업. 전 한국스페인어문학회장. 전 외교부 중남미 전문가 자문위원. 현 한
한국외국어대(스페인어 전공) 졸업. 전 한국스페인어문학회장. 전 외교부 중남미 전문가 자문위원. 현 한'칠레협회 이사

정권 바뀌면 정부 부처도 이합집산

큰 사건 일어나도 조직을 뜯어고쳐

들인 예산'노력만큼 효과는 의문시

제도보다는 사람 탓, 능률 숭상해야

지금 50대 이상의 세대라면 초등학교 때부터 근 30년간 무슨 공식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국민교육헌장이란 것을 줄줄이 외우며 자랐다. 정치적 의미를 안 따진다면 거기엔 지금 사용해도 좋을 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란 표현은 획일적인 군사 문화를 심으려 한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조선시대 때 형식 문제를 갖고 당파싸움을 하던 그런 식의 전통과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사회 곳곳에 체면 의식이 뿌리박혀 있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문구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형식도 실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포장술만 늘었고 매사 사람이 아닌 제도 탓으로 돌리는 풍조가 생겼다.

1970년대 말 경제성장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자 '정신'이 중요하다고 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했다. 1980년대 초 체육교사에 의한 제자 유괴 살인 사건이 전국적인 공분을 일으키자 제대로 된 교사 양성 기관이 긴요하다고 해서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교원대학교 설립이 성사되었다. 1990년대 초 한 명문여대의 유명한 무용가가 부정입학 주모자로 구속되자 한국종합예술학교 설립도 탄력을 받았다. 무슨 사건만 나면 제도 탓으로 돌리고 그럴듯한 명분을 들어 급히 새로운 조직'기구'기관을 만들어왔다.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으니 중앙정보부를 안전기획부로 바꾼 것은 좀 이해한다 쳐도 그것이 또 국가정보원으로 탈바꿈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보안사령부 소속의 무슨 이등병이 양심선언을 하는 일이 벌어지자 이 부대는 기무사령부로 바꿔 탔다. 정부 부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합집산을 한다. 최근엔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 같은 정권 임기 중에도 큰 사건이 일어나자 또 정부 조직을 뜯어고쳤다. 한국 정당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신한국당, 새누리당, 신민당, 새정치민주연합 등 이름마다 '새롭고 민주적'이다.

우리네 고등학교의 교과목 종류는 하도 많아서 교육현장에 있는 교사도 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다. 컴퓨터, 문학, 교육학, 철학 같은 교과서가 있는가 하면 수학이나 국어 같은 과목은 몇 가지로 세분화되어 있다. 미국식 교육학을 도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나 따르고자 하는 미국을 보자. 시간표는 그냥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사회이다. 기본을 충실히 다지는 수준이다. 그래도 노벨상은 거기서 다 나온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200년이 넘도록 이름이 바뀐 적이 없고 그 흔한 '신'이니 '새'니 하는 수식어가 없다. FBI와 CIA도 그대로고 중앙부처명도 안 바뀐다. 우리가 부정적 편견을 갖고 있는 멕시코도 정권을 빼앗겼을 때에도 혁명 정신을 이어받은 전통을 간직한 PRI(제도혁명)당은 100년간 이어져 오고 있다. 명칭과 제도 탓으로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무급 봉사직으로 시작했던 지방의회 의원이 언제부턴가 상당한 수준의 유급직으로 전환되었으나 지방정치가 발전하였다는 징조를 느낄 수 없다. 전국 곳곳마다 국제공항이고 컨벤션센터다. 예산의 효율성은 아예 도외시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공무원 인건비도 못 챙길 정도면서 시'군마다 국제 이벤트를 내세운다.

우리는 정말 이름을 바꾸고 제도를 포장하느라 들인 그 노력과 예산만큼 새로워졌는가? 입시 지옥이라는 교육현장은 정말 나아진 것이 있는가? 정신문화연구원의 후신인 연구원의 원장이란 사람이 국회에서 막말을 하지 않나, 환골탈태했다는 정보기관의 기관장은 왜 그리 감옥으로 가는가? 초유의 지진에 대처하는 안전 담당 국가기관이 방송국이나 기상청보다 뒤처져서야 되겠는가? 문화예술체육계의 고질적인 파벌 싸움은 없어졌는가? 우리 교수나 학자들은 정말 글로벌 수준에 도달할 만큼 준비되어 있는가? 국회법만 고치면 국회의장이 중립이 되고 여야는 싸움질 안 할까? 되돌아보고 자성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면피용 명칭 변경과 조직 개편에 현혹되지 않아야 바로 선다. 제도보다 사람 탓이 훨씬 더 크다. 진정한 능률과 실질을 숭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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