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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 '내 고향 대구' 낸 권영재 제2미주병원 진료원장

'수구꼴통' 도시 대구? "시대 따라 한쪽 날개 펄럭일 뿐, 외날개 가진 도시 아니다"

권영재 제2미주병원 진료원장이 매일신문
권영재 제2미주병원 진료원장이 매일신문 '주간매일'에 연재한 글을 모아 '내 고향 대구'를 펴냈다. 권 원장은 "그동안 나 혼자의 고향 짝사랑에 눈물이 났다"면서 "고향을 되찾는다는 신념으로 글을 썼다"고 말했다.
한일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대구시민들의 모습.
한일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대구시민들의 모습.

내 고향 대구

권영재 지음/온북스 펴냄/270쪽, 1만4천원.

권영재 제2미주병원 진료원장이 2014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동안 매일신문 '주간매일'에 연재한 글을 모아 책을 펴냈다. 저자는 "연재하는 동안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 독자들로부터 애교 섞인 항의(?)를 받곤 했지만 내 고향 대구를 추억할 수 있어 좋았다"며 "대구가 영광스러웠던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영혼의 수도'로 가꾸는 데 작은 자극이라도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해방둥이로 태어난 권 원장은 1960년대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 살다가 20년 후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그의 눈엔 대구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그동안 서울에서 '대구 사람'이라며 우쭐대며 살았는데 대구에 오니 너무 변했고 철저하게 파괴됐다고 했다. "내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던 고향의 사진이 한 장 한 장씩 찢겨져 갔다. 대구가 타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도 비켜간 대구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 스스로가 폐허로 만들고 말았다. 서울, 평양 다음으로 큰 도시였던 내 고향이 이렇게 찌부러들 수가 있단 말인가? 그동안 나 혼자만의 고향 짝사랑에 눈물이 났다"고 했다. 권 원장은 "고향을 되찾는다는 신념으로 글을 썼다"고 했다.

-대구 사람은 수구꼴통?

권 원장은 대구가 '수구꼴통의 도시'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대구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했다. 공산주의자가 많아 해방 전후에는 '한국의 크렘린'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어떤 사람을 평할 때 순간적인 모습만 보고 말하면 안 된다. 1946년 10월 1일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10'1사건)이 대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주동자들은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이다. 개발독재 시절을 거치며 대구 사람들이 한쪽에 치우친 모습만 보고 다른 지역 사람들은 대구 사람들이 원래 그런 줄 알고 있다. 대구는 두 개의 날개 중 한쪽 날개를 숨기고 있는 거대한 붕(鵬)새다. 시대에 따라 어느 한쪽 날개를 펄럭일 뿐이지 외날개를 가진 그런 시시한 도시가 아니다."

-대구는 인정 있는 도시?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밀려 대구에도 피란민이 많이 모여들었다. 전쟁통에 생긴 시장이 '양키시장'이다. 피란민 속에서 나온 물건과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이 뒤섞여 '난장'이 섰다. 그것이 커져 시장(교동시장)이 됐다. 권 원장은 그 당시 대구 사람들은 북에서 몸뚱어리만 갖고 피란온 그들을 품어줬다고 했다.

"교동시장은 이북 출신 피란민들이 이룬 시장이다. 당시 어른들은 '피란민의 강인하고 진취적인 정신과 행동으로 만든 시장'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만약 남한 사람들이 이북에 피란을 갔으면 전부 거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북 출신 피란민들이 그들의 옷가지까지 팔아 가면서 장사 밑천을 만들어 타향에서 적수공권(赤手空拳: 빈손과 맨주먹, 즉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성공을 보여준 곳이 바로 교동시장이었다." 권 원장은 양키시장 상인 가운데 북한 사람이 많아 냉면이랑 개고기, 빈대떡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탈북자들이 서울 다음으로 대구에 많이 살고 있는 이유도 이런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권 원장은 "지금은 아니다"고 손을 내저었다.

-영호남 간 지역감정에 대해?

권 원장은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전라도 사람과 친했다고 했다. 큰장(서문시장)은 전국의 고객이 모여드는 곳인데, 특히 전라도 상인이 많았다고 했다. "'전라도에 풍년이 들면 대구가 부자 된다'란 말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주 사업이 농업이었고, 전라도는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라도와 대구는 한배를 탄 정다운 친구였다. 전남 담양 사람들은 대구에서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광주에서 왔다"며 대나무 제품을 산더미처럼 짊어지고 가가호호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부잣집에서는 죽제품 장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잠도 재워주었다. 대구 사람들은 그들의 말투가 재미있어 '광주서 왔땅게' 하며 놀리기도 했다. 그것은 친구끼리의 악의 없는 농담이었고 친한 표시였다. 그들이 대구 사람에게 '경상도 보리 문둥이'라고 해도 화를 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대구의 상품이 전라도로 팔려가니 그들은 주요 바이어로 대구 사람들에겐 고마운 친구였다."

권 원장은 경부'호남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전라도 상인들은 대구를 외면하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했다.

권 원장은 1960년대에 서울로 유학 갔을 때 '경상도 학생'들은 인기가 있었다고 했다. "서울 마나님들이 일류대학 입학시험장에 나타나 '합격하면 자기 집의 가정교사'로 오라며 '입도선매'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제 서울 사람 가운데 대구 사람을 미워하는 부류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대구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을 잘 모른다. 주위 환경의 변화 탓이라며 변명을 하고 있다. 경제적 환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전의 그 향기 나던 대구 사람들로 돌아가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때"라고 힘주어 말했다.

◇권영재는?

저자 권영재는 대구 중구 동인동에서 태어나 경북중'고, 가톨릭대 의대를 졸업하고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됐다. 대구정신병원 의무원장,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제2미주병원 진료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정신건강클리닉' 전문서를 비롯해 '거리에 선 청진기'(수필), '어느 따뜻한 봄날의 추억'(소설), '소소한 행복'(수필), '아름다운 사람들'(논픽션) 등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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