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준의 대담] 곽상용, 파머스 가든 봄 대표/ 전 삼성생명 부사장

"잡초 뽑으면 근심거리 사라져…머리 안 쓰고 몸 쓰니까 행복"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행정고시를 했고 재경부와 청와대에서 근무를 했다. 말하자면 잘 나가는 경제관료였다. 하지만 2002년 돌연 19년의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민간기업인 삼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핵심적인 일을 하며 상무, 전무, 부사장 등 임원으로 11년을 보냈다.

그러다 2013년 겨울, 다시 삼성을 그만두고 귀농했다. 지금 경기도 양평에서 '파머스 가든 봄'이라는 이름으로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다. 또 레스토랑과 갤러리 그리고 작은 채플이, 벚나무 길과 야생화, 또 그 바로 옆을 흐르는 한강과 잘 어울리는 정원을 가꾸고 있다.

편한 작업복 차림의 그와 함께 정원을 둘러봤다. 그리고 무엇이 그를 이리로 이끌었는지 물었다. 정원 안의 레스토랑, 그 테라스에서였다. 대담 자체가 힐링이고 휴식이었다. 독자들에게 그 모두를 나누어줄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김병준: 정원이 멋있다. 넓이가 얼마나 되나?

곽상용: 모두 2만 평 정도 된다. 일부는 농사를 짓는다.

김병준: 직접 가꾼 건가?

곽상용: 직장 생활을 하며 조경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나가야 하니 조경회사에 맡길 수밖에 없었는데 사직하고 와 보니 문제가 많았다. 심어 놓은 나무들이 죽고 그랬다. 할 수 없이 그때부터 배워가며 직접 심고 가꾸고 있다.

김병준: 지금도 계속 손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곽상용: 귀농하고 나서 바뀐 게 있다. 일종의 느린 삶이랄까, 올해 이만큼, 내년에 저만큼 한다. 하나가 잘 자라는 것을 보며 다른 것을 심고, 한 곳이 잘 어우러지는 것을 보며 다른 곳을 손본다. 그래서 이 정원은 늘 새롭다.

김병준: 느린 삶?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곽상용: (바로 앞의 배초향꽃 등을 가리키며) 여기도 작년 봄에 손봤다. 저 꽃들 봐라. 제대로 된 흙을 넣은 다음 다른 데서 자라는 것 몇 개 뽑아서 옮겼는데 저렇게 번졌다. 기가 막히지 않나.

김병준: 정원 한가운데의 벚나무 길이 참 좋다. 그리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 바로 한강이 흐른다.

곽상용: 사실 이 벚나무들을 보고 "여기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가시넝쿨과 잡목들이 우거져 있었고 그 속에서 벚나무들도 빛을 잃고 있었다. 아내가 이 옆의 땅을 조금 가지고 있었는데, 아내 역시 거의 버려두듯 한 땅이었다. 그러다 농사짓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서 와 보게 되었고, 그때 이 나무들을 보게 되었다.

김병준: 예사롭지 않은 나무들이다. 생긴 모양도 재미있고 키도 엄청나게 크다.

곽상용: (활짝 웃는 표정으로) 65년 전에 동네 분이 용돈 벌이 삼아 어린 묘목들을 마구잡이로 땅에 꽂았던 모양이다. 그 뒤 반듯하게 자란 놈은 팔려나가고 구부러지고 못난 놈들만 남게 되었는데, 너무 촘촘히 심은 탓에 남아 있는 놈들이 옆으로 자라지 못한 거다. 햇빛을 좇아 위로만 올라가다 보니 저렇게 된 거다.

김병준: 세상일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 그때 팔리지 않은 녀석들이 이렇게 멋있다. 꽃도 저 위쪽에서 피나?

곽상용: 그렇다. 정말 볼만하다.

김병준: 정원 안에 갤러리도 있고 작은 채플, 즉 예배당도 있다. 갤러리는 그렇다 치고 어떻게 채플이 있나?

곽상용: 기독교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불교를 포함해 어떤 종교든 기도를 하거나 묵상을 할 수 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음 편히 식사하고 차 마시고, 그러면서 정원을 즐기게 하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채플과 그 안에서의 기도가 정원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병준: 갤러리도?

곽상용: 역시 정원의 한 부분이다. 늘 그림이 있고, 때로 그 앞에서 작은 음악회도 한다. 이 모두가 소박하게 어우러지면서 정원이 된다.

김병준: 어떤 작품을 주로 거나? 그리고 음악회는?

곽상용: 주로 중견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해 왔다. 지금은 장태목 화백 작품을 전시하고 있고, 이어 정신과 전문의로 잘 알려진 이시형 박사의 문인화 전시회 등으로 이어진다. 대관료는 받지 않으며, 오프닝 비용은 우리가 부담해 준다. 내년부터는 젊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다. 음악회는 계절에 맞춰 오페라 갈라 콘서트 같은 걸 한다. 때로 젊은 현악 연주자들을 초청해서 듣기도 하고.

김병준: 건물들이 단순하고 소박하다. 누가 설계했나?

곽상용: 원래 농사짓던 사람들이 밥을 먹던 허름한 집이 하나 있었다. 그걸 건축가 최시영 선생 등과 머리를 맞대며 고쳤다. 이게 레스토랑이다. 평수도 모양도 예전과 큰 차이가 없다. 갤러리와 채플은 기본적으로 나와 주변 식구들의 구상이다. 배가 한 척 하늘하늘 떠 있는 단순함을 생각했다. 그래야 그 안의 그림이 살고, 자연과도 조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병준: 한때 잘 나가는 경제관료였다. 좋은 대학 나와서 행정고시를 했고, 경제 부처와 청와대에 근무했다. 그대로 갔으면 차관 장관도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만두고 삼성으로 갔다.

곽상용: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무조건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국가가 보내줘 2년간 미국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때 생각이 좀 달라졌다. 이제 국가가 민간을 끌고 가는 시대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병준: 바로 그만두지는 못했을 것 같다. 국비 유학을 했으니 의무적으로 근무해야 하는 기간도 있었을 것이고.

곽상용: 귀국 후 금융기관과 대기업들 구조조정하는 일을 했다. 이어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으로 있으면서 부실기업 매각하는 일 등을 했다. 그러면서 그만둔다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김병준: 공무원이 체질에 맞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곽상용: (웃음) 아니었다. 못 버텨 나온 것은 더욱 아니다. 공무원 이외의 다른 의미 있는 삶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혼자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미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 말고도 정부에 남을 훌륭한 동기들도 많은 것 같았다.

김병준: 왜 삼성으로 갔나?

곽상용: 처음에는 외국계 회사를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삼성 분들을 만나 구조조정이나 기업합병 등의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네 그룹 구조조정본부도 그런 일을 한다고….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김병준: 어땠나? 할 만했나?

곽상용: 11년 동안 많이 배웠다. 회장 비서실에서 회장을 모시기도 했고, 다른 중요한 일도 많이 했다. 다만 스트레스가 대단했다. 재경부와 청와대에 있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그보다 훨씬 더했다.

김병준: 당연히 공직사회보다야 스트레스가 심하겠지.

곽상용: 단순히 그렇지가 않은 게 재경부와 청와대는 그냥 공직이 아니다. 만 19년 공직생활에 여름휴가를 온전히 가 본 적이 없다. 아침 시간에는 장관 등 윗분들이 밖으로 나가 있어 회의도 제대로 못한다. 그래서 조금 느슨하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툭하면 새벽 2~3시 귀가에 주말도 없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김병준: 삼성이 그보다 더했다?

곽상용: 시간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활용한다. CEO부터 신입사원까지 한꺼번에 모여 처리하고 쉴 때는 쉰다. 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는 대단하다. 한동안 늑대 굴 피해서 호랑이 굴로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병준: 처우는 좋았을 것 아닌가?

곽상용: 귀농을 해 보니 나는 일당 7만원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예초기를 제대로 돌릴 줄을 아나, 낫질을 제대로 하나. 그런 나를 잘못 보고 이건희 회장께서 뭔가 과하게 주셨다(웃음).

김병준: 농사짓고 정원 가꾸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곽상용: 30~40년 도시 생활을 하고 나니 뇌를 너무 혹사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음악회도 가고, 클래식을 틀어놓고 잠을 자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어느 순간 부모님과 함께 흙을 만졌던 그때가 그리워졌다. 그게 행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병준: 그래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시에 있으면 비싼 사람인데, 말한 것처럼 농촌에 오면 일당 7만원짜리도 안 될 수 있다.

곽상용: 부사장 승진 이후 깊이 고민했다. 사장이 되기 위해 죽으라고 더 뛸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가? 여기까지란 생각이 들었다. 사장은 나보다 더 하고 싶은 사람도 많은 것 같았다. 늘 자신 있던 건강에도 이상이 생겼다. 혈압이 엄청 올라갔고 혈당도 이상해졌다. 더 무리하면 나도 회사도 불행해질 것 같았다.

김병준: 그래서 결국 땅을 보러 다니게 된 거고?

곽상용: 처음에는 해외에 나갈까 했다. 고대사에 관심도 있고 해서 옌볜이나 백두산 쪽 광활한 땅에서 유기농 농사를 하고 싶었다. 실제로 생태 전공하는 교수들과 이쪽을 탐방하기도 했다.

김병준: 고향으로 간다는 생각은 안 했나?

곽상용: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떠났기 때문에 연고가 없어졌다. 오히려 해외로 나가느냐 연고가 있는 서울 근처로 가느냐를 두고 고민했다. 그러던 중 건축가 최시영 선생이 '도시농부'라는 테마로 양평에서 이런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 했다. 그래서 여기를 와 보게 되었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저 벚나무들을 보게 된 것이다.

김병준: 이제 스트레스가 없나?

곽상용: 누가 요즘 어떠냐고 물으면 "머리 안 쓰고 몸 쓰니까 행복하다"고 말한다. 농사가 머리를 안 쓰는 건 아니지만 스트레스 안 받는다. 잡초 뽑아 봐라. 한참 뽑고 있으면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진다.

김병준: 건강은?

곽상용: 좋아졌다. 하루 최소한 2만 보를 걷는다. "모종삽 안 가져왔네"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이것저것 가져오라 하면 가져가기도 해야 한다. 팔, 다리가 다 강해졌다.

김병준: 동네 분들과 잘 지내나?

곽상용: 불편한 게 왜 없었겠나. 꽃만 심고 있어도 농사 안 짓고 꽃 심는다고 군청에 신고하곤 했다. 오히려 군청에서 너무 그러지 말라고 말해 줄 정도였다. 지금은 좋다. 얼마 전에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동네 사람들이 동네 협동조합의 이사로 선임해 주었다.

김병준: 무슨 조합인가?

곽상용: 마을 공동으로 산나물과 약초를 재배하고, 옛날에 산적들이 살았다는 산중마을 근처를 '둘레길'처럼 가꾸는 일을 하는 조합이다.

김병준: 잘 지내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한 모양이다.

곽상용: 다른 것 없다. 진정성을 보이면 된다. 부동산 투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정말 어울려 살고 싶어 온 것을 보여주면 된다. 내 스스로 찾아가 형님, 동생 했다. 술 한잔하고 흐트러지는 모습도 보였다.

김병준: 이제 이 정원이 꽤 알려진 것 같다.

곽상용: 한번은 드라마의 로케이션 장소로 쓰겠다고 제안을 해 왔는데 거절을 했다. 나중에 그게 중국에서까지 크게 흥행한 걸 보고 잘못했나 했다. 하지만 금방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객을 받아들일 역량이 안 되기 때문이다.

김병준: 그냥 이 정도가 좋다?

곽상용: 늘 새롭게 가꿀 것이다. 농사도 계속 지을 것이고.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그리고 아이들 3대가 같이 찾아 쉬는 정원과 휴식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그리고 문화와 소득, 여유가 있는 농촌을 만드는 일을 같이할 것이다.

김병준: 끝으로 금융위원회 표지석을 여기로 옮겨 놓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곽상용: 프레스센터에 세들어 있던 금융위원회가 정부서울청사로 옮기면서 표지석이 필요 없게 됐다. 그런데 국가기록원이 이를 접수해서 보관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한다. 결국 깨어서 버려야 하는데, 금융 역사의 한 부분이자 대가들이 만든 그 귀한 것을 그럴 수 있나.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김석동 전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여기로 옮겨 놓았다. 땅을 가진 후배라 편안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김병준: 어디에 있나?

곽상용: 햇볕 잘 드는 곳, 동쪽을 보도록 놓아두었다. 두 달만 보관하자고 하더니 지금은 언제 찾아갈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것 같다.

김병준: 나가면서 한 번 보고 가야겠다. 감사하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