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트럼프, 미국의 '혼네'

미국 대선 레이스가 종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지난 9일(현지시간) 2라운드까지 TV토론 대결이 끝났고 다음 주 3라운드만을 남겨 두고 있다. 투표일까지 한 달 가까이나 남았는데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굳히기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솔솔 흘러나온다.

클린턴은 지난 두 차례 토론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압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여성 비하, 인종'종교 차별 발언, 납세 자료 공개 거부 등 트럼프의 아킬레스건을 공략했고, '음담패설 녹음 파일'로 상대를 코너에 몰아붙였다. 음담패설 논란 이후 공화당 권력 서열 1위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마저 등을 돌린 지경이니 어쩌면 대선 승부는 이미 끝난 건지도 모르겠다.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이쯤에서 지난 1년여간 국외자로서 지켜본 미국 대선전 관전 소감을 적어본다.

맨 먼저 든 느낌은 의아함이다. 미국인들의 마음속 깊이 있는 본심은 뭘까. 트럼프는 어떻게 이런 뭇매에 가까운 비판을 받으면서도 대선 후보에까지 올랐고, 오늘까지 굳건한 지지층을 거느리고 있는 것일까. 그의 '믿는 구석'은 도대체 무엇일까. 끊임없는 탈세 논란과 거짓말, 여성 비하 혹은 혐오, 백인 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 그를 따라다니는 수많은 부정적 수식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에게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최근 들어 균열 조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단단함은 상당한 수준인 것 같다.

바로 며칠 전이다. 외설 논란 직후 대표적인 경합 주로 분류되는 오하이오와 펜실베이니아 유권자들에게 물었더니, 상당수가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한다. CBS뉴스가 조사한 결과이다. 오하이오의 트럼프 지지자 가운데 91%는 음담패설 폭로 이후에도 트럼프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지 않았다고 답했다. 펜실베이니아서도 90%가 같은 대답을 했다. 미국인들의 속마음, 국외자들이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겉으로는 드러내 보이지 않는 본심을 보여주는 수치이다. 트럼프는 자신들의 속내를 분출시켜 주는 '입'이자 대리인인 것이다.

흔히 일본인들을 이중적 태도를 가진 민족이라고 말한다. 일본인들에게는 '다테마에'(建前)로 표현되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과 '혼네'(本音)라고 일컫는 숨겨진 속마음, 즉 본심이 완전히 다르게 존재한다고 한다.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친절하며 남을 배려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드러내지 않는 속마음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에게만 유독 특유하다고 생각해 왔던 이런 이중성을 요즘 미국인들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을 미국의 가치라고 외쳐대던 사람들의 뱃속을 들여다보니 백인 우월주의와 이기심, 남녀 차별적인 속성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트럼프의 험구(險口)-이웃나라와의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겠다든가 무슬림을 추방하겠다는-가 카타르시스로 다가오지 않았겠는가.

클린턴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은 것도 미국인들의 혼네로 읽혔다. 클린턴은 백악관의 안주인에 국무장관 상원의원까지 역임한 풍부한 정치 경험, 강한 신념과 열정, 카리스마 등 지도자로서의 역량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데도 젊은 층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단다. 어쩌면 그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뉴욕타임스(NYT)의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늘날 공공연하게 여성을 억압하는 사례는 없지만 여성을 향한 편견, 가부장적 태도는 남녀를 불문하고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 같다"고.

결과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역사상 가장 추잡스러운 대결'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트럼프에게서 미국인들의 민낯을 본 것 같아 씁쓸하다. 나라의 이익, 국민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서 결국 내 나라, 내 일자리, 내 민족만이 중요한 건 어느 나라 국민들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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