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자백

'간첩'없으면 만든다…추악한 공권력의 조작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한 재판을 마치고 나오는 원세훈(가운데) 전 국정원장과 그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최승호 감독.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한 재판을 마치고 나오는 원세훈(가운데) 전 국정원장과 그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최승호 감독.

MBC 해직 기자이자 인터넷 대안 뉴스 채널 '뉴스타파'의 피디인 최승호가 한 가지 소재를 집요하게 파고든 끝에 완성한 다큐멘터리 영화 데뷔작이다. 출연진의 면면이 화려하다. 공안검사 출신으로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국회의원, 대통령 비서실장 등 유신 시대부터 2010년대까지 현대사에서 가장 화려한 공무원 생활을 해온 김기춘, MB맨으로 국정원장이 된 원세훈. 우리가 아는 그 사람들이 출연진 리스트에 올라 있다.

영화는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다. 우연히 간첩으로 지목되어 가족 구성원 모두의 삶이 무너지고만 어느 불행한 청년의 삶을 기록한 휴먼다큐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가권력의 심장부 국정원을 겨냥하는, '미스터리 액션 추적극'이다. 탐사 다큐멘터리 '자백'은 미스터리로 출발하여 하나하나 사건의 본질에 접근해나가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한국, 중국, 일본, 태국 등 4개국을 넘나들며 40개월간 추적한 끝에 간첩 조작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다.

응당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어지겠지 기대하던 소재이다. 하지만 재미보다는 의미를 찾는 장르인 다큐멘터리이고, 간첩으로 몰렸다 무죄로 풀려난 유우성의 이야기를 이미 잘 알고 있고, 국정원 개혁이라는 이슈는 저 멀리 가버렸다. 그래서 재미를 그다지 기대하지는 않았다. '방송국 출신 감독이 영화라는 매체가 방송과 얼마나 다른지 잘 알까' 하는 의심으로 가득한 채 극장으로 들어섰다. 점점 더 비정상이 정상인 양 활개를 치며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서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여기 한국에도 '마이클 무어' 비슷한 사람이 나타난 것 같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수많은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들은 잠깐 열혈 관객들의 호의를 받게 되지만 길게 가지는 못한다. 영화로서의 예술적 완성도와 관객과의 소통이라는 대중성 없이 당위성만 가진다면, 그 영화는 같은 생각을 가진 소수 집단에게만 호소하고 끝날 운명을 가진다.

단연코 '자백'은 그렇지 않다. 다큐의 핵심인 사회 고발성, 그를 뒷받침할 만한 탄탄한 탐사보도성, 차근차근 끌어당기는 설득성, 적절한 휴머니즘적 순간과 깨알 같은 유머가 골고루 섞여 있다. 분노가 치솟다가 이내 피식 거리게 만드는 영화적 재미가 만만치 않다.

영화에서는 3가지 이야기가 섞인다. 유우성 가족 이야기가 큰 축으로 전개되고, 두 개의 또 다른 간첩사건들이 펼쳐진다. 간첩으로 몰리다 자살하고만 어느 남자가 있고, 북한에 살고 있는 그녀의 어린 딸은 아빠의 운명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1970년대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이 있다. 조국을 더 잘 알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을 온 이들은 유신이라는 엄혹한 정치적 환경에서 간첩으로 둔갑한 후 수십 년 뒤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대 푸릇푸릇한 청춘이었던 김승효는 극심한 고문을 받고 정신이 피폐해졌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삶으로 고통받던 그가 똑똑히 카메라 앞에서 말한다. "한국은 나쁜 나라입니다."

용산 참사를 다룬, 성공한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이 가해자에게도 카메라를 가져가 사건의 이면을 공정하게 파헤치고자 애썼듯이, '자백' 또한 국정원과 검찰 권력자들에게 다가간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아무렇지도 않게 기계적으로 협력한 보통사람을 보며 '악의 평범함'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내었다. 그들은 자신이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 아렌트는 이들에 대해 그들이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에 반인륜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결여 때문에 부당한 직무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직무에 충실하는 모범 국민이 있고, 부당한 것에 저항하는 사유하는 시민이 있다. 우산 아래 웃고 있거나 도란도란 웃으며 지나가는 그들의 얼굴에서 악의 평범성과 심리적 불감에 대해 생각해본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연민의 성정이 사회를 보다 인간다운 곳으로 만들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 끝도 없이 올라가는, '간첩 조작 사건 무죄 판결 리스트'는 영화가 보여준 것 이상의 것을 말해준다.

영화는 개봉 전 진행된 '다음 스토리펀딩'에 참여한 1만7천261명과 뉴스타파 회원을 포함한 4만3천566명의 후원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지난 4월 개최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상과 넷팩상 등 2관왕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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