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경주 기계천 미군폭격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에 다녀왔다. 경주 양동초등학교에서 열린 위령제는 2010년부터 매년 유족들과 주민, 관계 공무원 등이 모여 행사를 진행한다. 기자는 유족 자격으로 첫 위령제 때부터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위령제에 참석할 때면 '국가의 역할'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경주 기계천 미군폭격사건은 전쟁을 빙자한 국가의 '야만성'과 '폭력성' '인권유린'의 행태가 고스란히 응축된 사건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남진하면서 대한민국은 낙동강 전선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당시 경주에는 안강 쪽에 국군이 다수 주둔했고, 양동과 안계 쪽에서 인민군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양동 쪽에 남아 있던 국군은 인민군과의 전투를 대비해 형산강과 기계천을 건너 안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계 심동 주민들도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이웃들과 함께 기계천으로 갔다. 생존자들은 수백~수천 명의 피란민이 기계천 내에 퍼져 있었다고 증언했다.
사건이 발생한 8월 14일 오전 '모스키토'라고 불리는 정찰기가 피란민 상공을 한 바퀴 돈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전쟁 중에 흔히 있는 단순한 작전 수행이라고 생각한 피란민들은 손을 흔들며 환영했다. 잠시 후 벌어질 피 튀기는 살육의 전조라고 생각한 피란민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점심 시간을 전후로 두 대의 폭격기가 남쪽인 경주 방면에서 날아오더니 갑자기 강둑에 네이팜탄 2발을 투하했다.
혼비백산했지만 다행히 큰 인명 피해는 없었다. 이어 폭격기는 기계 쪽을 향해 날아가다 피란민을 향해 되돌아왔다. 믿기 힘든 상황이 벌어졌다. 피란민을 상대로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아비규환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생지옥이 연출됐다.
사상자 70여 명 중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는 남성 19명, 여성 16명 등 총 35명, 부상자는 8명이다. 기자의 9세, 7세 된 삼촌을 비롯해 10세 이하의 어린이도 다수 사망했다. 당시 4세였던 한 유족은 부모와 형을 잃고 평생 자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가지지 못했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았던 탓에 죽은 형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사용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었다. 유족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이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건 발생 59년이 흐른 2009년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지금은 없어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당시 폭격기의 임무보고서(Mission Report)를 발견한 것이다. 임무보고서에는 '1950년 8월 14일 미 공군 제18전폭기단 소속 제39전투편대의 F-51 폭격기가 낮 12시 30분에 이륙해 강둑에 2개의 네이팜탄을 투하했고, 기계 남동쪽 4분의 1마일 지점에서 50구경 기총을 발사한 뒤 오후 2시 30분에 도착했다'고 적혀 있다. 놀라운 것은 '피란민으로 여겨졌기에 되돌아가 강을 가로질러 50구경 기관총을 소량 발사했다'고 적시돼 있다. 폭격기 조종사는 민간인이라는 점을 알고도 총을 발사했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국제인도법이나 제네바협약은 전시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미군이 국제법상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가장 큰 책임은 우리 정부에 있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과 관련해 미군은 정책 결정을, 한국 정부는 정책 실행을 맡았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군 남진에 따른 주민 소개 조치나 피란 지시, 안내 수행 등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정부가 보호해 주지 않은 국민을 다른 국가가 보호해 주길 기대하기 힘든 노릇이다. 자국민의 생명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국가는 '국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국가로서의 자격이 있나? 위령제 참석 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