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11월 21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실시된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에 대한 참여정부의 기권 방침이 결정된 시점은 그해 11월16일일까, 아니면 11월20일일까.
'송민순 회고록' 파문의 핵심 쟁점 중 하나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기권 방침 '재가 시점'이 논란의 의혹을 풀어줄 중요한 열쇠로 지목되고 있다.
16일이냐 20일이냐는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주장하는 '사전 문의'인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측이 반박하는 '사후 통보'인지를 판가름할 주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문 전 대표 측 주장은 이렇다.
2007년 11월 15일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이 주재한 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다수의 참석자가 기권을 주장한 가운데에서도 송 전 장관은 끝까지 찬성 입장을 고수했고, 이런 내용이 노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문 전 대표는 처음에 찬성 입장을 피력했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막판에 기권 입장으로 돌아섰다는게 이재정 전 통일부장관의 주장이다. 노 대통령은 이를 토대로 이튿날인 16일 직접 회의를 주재해 기권 방침을 결정했다는 게 요지다.
다만 노 대통령의 결정에도 송 전 장관이 대통령에게 '울분에 찬' 자필 편지를 보내면서 찬성 입장을 고수하자 18일 관련 장관·참모들이 다시 모여 안보관계장관회의를 했고, 결국 변경된 사안은 없었으며, 남북정상회담 직후 북한 총리가 청와대를 방문하는 등 다양한 남북 대화가 이뤄지고 있던 시점이어서 기권 입장을 북한에 '사후 통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방침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당시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당시 노 대통령의 싱가포르 방문을 수행 중이었던 천 대변인은 21일 현지 브리핑에서 "어제(20일) 저녁 늦게 대통령께서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과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으로부터 유엔 대북결의안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상황과 기권방안에 대한 우선적인 검토 의견을 보고받고, 이를 수용했으며 정부 방침이 결정됐다"며 "이는 최근 남북관계 등을 고려한 것"이라고 밝혔다.
천 대변인의 이 말만을 놓고 보자면 '11월 20일 저녁 늦게' 노 대통령이 기권방안이 우선이라는 외교안보 참모들의 검토 의견을 보고받고 이를 수용해 재가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다. 이는 11월 16일이 아니라 11월 20일에 기권 방침이 결정됐다는 송 전 장관의 회고록 내용과 가깝다.
"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대북결의안 문제에 대한 토론이 있었고, 다수가 기권 의견이었지만 상황을 보면서 최종 방침을 결정하기로 했고, 어젯밤 대통령 재가로 방침이 정해졌다"는 당시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의 배경 설명 언급도 이를 뒷받침한다.
송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20일 밤 노 대통령 숙소에서 함께 자리를 한 백종천 안보실장으로부터 북측 입장이 담긴 '쪽지'를 전달받았고,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자신에게 "그냥 기권으로 갑시다. 묻지는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며 결론을 내렸다고 적었다.
이에 문 전 대표 측은 오히려 당시 청와대 대변인 브리핑의 정황은 송민순 회고록 내용을 뒷받침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송 전 장관을 배려하고 설득하던 당시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문 전 대표의 대변인격인 더민주 김경수 의원은 18일 YTN 라디오에 출연, "16일 회의에서 대통령이 기권을 결정했지만 직접 유엔에서 표결해야 할 외교부 장관이 편지도 올리면서 찬성을 계속 주장하니까 입장을 발표할 수 없었다"며 "외교부 장관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발표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외교부 장관을 설득해 표결 전날인 20일 저녁에 안보실장이 북한의 반응까지 종합해 대통령에게 다시 한 번 보고를 한 것 같고, 그 자리에서 외교부 장관도 표결 전날이니까 그때는 수긍했고 그러니까 발표를 한 것"이라고 했다.
당시 청와대 브리핑 당사자인 천 전 대변인도 당시 브리핑이 논란이 되자 이날 기자들에게 보낸 공지문자를 통해 "16일 회의에서 기권을 결정했지만, 주무장관인 송 장관이 반발하니 표결 전까지 시간을 갖고 의견을 들어주시고 설득한 것"이라며 "20일 저녁 대통령이 백 실장과 송 장관을 불러 송 장관을 최종 설득하고 21일에 최종 발표된 것"이라며 말했다.
이와 관련, 새누리당 김현아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당시 청와대 대변인 브리핑을 근거로 "북한 인권결의안에 대한 기권방침은 유엔 총회 표결을 앞둔 20일 밤 노 대통령 재가를 통해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들은 미국이 우리에게 재차 북한인권결의에 찬성할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며 "따라서 미국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상 최종 결정에 영향을 준 상황은 바로 '북한의 반대'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 부분이 바로 북한 정권의 결재를 기다렸다는 회고록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16일 회의에서 '기권' 결정이 이뤄졌느냐, 결론을 내리지 못했느냐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정작 16일과 18일 회의의 공식 기록은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됐다.
당시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한 한 관계자는 "안보실장이 공식 주재하는 회의인 15일 안보정책조정회의와는 달리, 16일처럼 대통령이 장관들을 불러 의견을 묻는 비공식회의나 18일 같은 약식회의의 경우에는 공식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만일 16일 회의에 대한 기록이 실제로 남아있지 않을 때에는 양측 주장의 진위를 가리기가 어려워져 진상은 미궁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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