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문화와 정치 간의 기묘한 역학관계

이효석.
이효석.

산허리를 채운 메밀꽃이 달빛 아래로 소금을 뿌린 듯 하얗게 빛나는 늦여름 밤, 인적 드문 산속 물레방앗간에서 우연히 마주친 젊은 남녀. 참으로 에로틱한 광경이다. 그러나 이 두 남녀가 그 하룻밤을 끝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한 채 제각각 그 하룻밤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1936년)은 달빛에 홀려서, 메밀꽃 흰 빛깔에 취해서 그렇게 함께 하룻밤을 보낸 후 다시는 만나지 못한 남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두 남녀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늦여름 달빛 아래에서 함께 보낸 그 하룻밤은 에로틱하기보다는 비극적일 정도로 낭만적이다.

소설은 늦여름 강원도 봉평, 떠돌이 장꾼 허생원이 파장을 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미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허생원에게 친구라고는 파리 한 마리 쫓을 힘조차 없는 초라한 꼬리를 지닌 늙은 당나귀 한 마리뿐이다. 술집에서 우연하게 만난 동이라는 소년을 길동무 삼아 메밀꽃 핀 늦여름 밤 봉평 시골길을 걸으면서 허생원은 20여 년 전의 그 기억을 새삼 떠올린다. 길을 걷는 동안 동이가 허생원처럼 왼손잡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봉평이 고향인 동이 어머니가 20여 년 전 누구도 모르는 남자의 아이를 가져 고향을 등지고는 신산한 세월을 살아온 것이 동이의 입을 통해 알려진다. 소설은 이 지점에서 끝이 난다.

독자들이 기대하는 '엄마 찾아 삼만리' 식의 눈물겨운 부자 상봉 장면 따위는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소설이 끝나고 나면 고향과 연결된 따뜻한 기억만이 여운처럼 남는다. 나른한 늦여름 밤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조선의 전통적 시골길 정경이나 당나귀로 물건을 실어 전국을 돌아다니는 장꾼들의 모습 같은 소멸해가는 조선의 전통적 풍경이 남녀 간의 애틋한 이야기에 힘입어 되살아나는 것이다. 서구 근대문물 앞에서 자리를 잃어가던 동양 정서와 조선 전통의 따뜻한 기억이 거기에 있었다.

'메밀꽃 필 무렵'이 발표된 것이 중일전쟁을 앞두고 일본이 조선을 옥죄던 혹독한 때였으니 그런 위로 정도는 삶에 지친 조선인들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효석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 따뜻한 위로는 오히려 삶에 지친 많은 조선인을 거대한 전쟁의 광풍 속으로 내몬 폭력적 힘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세계 제패를 위해 '서양'을 물질 중심의 비윤리적 세계로 규정하면서 '동양' 정신의 복원을 주창하고 있었고, 복원을 이끄는 주도적 세력으로 일본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니 전통적 조선이나 동양적 정신의 안온함에 마음을 의탁하다 보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아시아를 하나로 모아서 서양에 대적하자"는 '대동아공영권'의 교활한 전쟁 논리에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 조선을 추억하고, 그 복원을 염원하는 따뜻한 마음이 어느 틈엔가 전쟁에 대한 강렬한 찬동으로 연결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가수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런 의외의 사실에 대해서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밥 딜런의 가수 경력과 반전(反戰) 성향을 비판한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이효석이나 미국의 밥 딜런 경우에서 보듯, 문화나 예술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당대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어쩔 수 없이 연결되기 마련이다. 사회가 혼탁할수록 그 경향은 더 강하게 드러난다. 문화를 향한 정치의 끊임없는 구애라고도 볼 수 있는 문화와 정치 간의 이 긴밀한 관계는 대중에게 미치는 문화의 힘이 그만큼 강력함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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