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준의 대담] 사회적기업 이끄는 정주영 손자, 정경선 대표

재벌 손자가 왜? "착한 일하며 '좋은 세상' 변화 이끌고 싶다"

"앞으로도 기업 활동과 사회적 가치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현대가 3세인 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서 사회적기업가들을 지원하며 '소셜 생태계'를 개척한 인물이다. 정 대표가 루트임팩트에서 운영하는 카페 '오늘살롱' 지하 1층 도서관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번 '대담'의 상대는 서른을 갓 넘긴 젊은이다. 긴 세월 한 분야에서 종사하다 다른 일로 제2의 인생을 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일을 함께하고 있는 분들을 만나 온 지금까지의 '대담'과는 사뭇 다르다.

정경선, 그는 현대 창업주 고(故) 정주영 회장의 손자이자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의 외아들이다. 그를 만난 이유는 그가 갈 만한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길이 곧 우리의 미래를 위한 길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아직은 생소한 '임팩트 사업', 즉 사회적 가치와 재무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뛰는 젊은이들을 지원하고, 사회적 가치는 크지만 투자를 유치하기 힘든 사업에 투자를 하는 일이다.

'루트임팩트'를 설립하고 서울 성수동에 자리를 잡은 지 4년. 이 짧은 시간에 그는 성수동을 사회적 가치가 높은 일을 하는 사회적기업과 소셜벤처(social venture)가 몰려 있는 일종의 '밸리'로 만들어 놓았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 동네, 그가 만든 공간 '오늘살롱'에서 그를 만났다. 그리고 왜 이 길을 가고 있는지를 물었다.

김병준: 집안 등 주변에서 이런 일을 하는 걸 두고 뭐라 하지 않나?

정경선: 돈부터 벌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다.(웃음)

김병준: 당연한 충고(?) 아닌가?

정경선: 어느 쪽이 더 플러스가 되는지 알 수 없다.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면서도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좋은 분도 많이 만날 수 있어 좋다.

김병준: 언제부터 이런 일에 관심이 있었나?

정경선: 2008년 말 전역을 하고 잠시 일본에서 인턴을 했다. 대기업이었는데 사회공헌부가 그룹의 가장 핵심 파트인 전략실에 있는 걸 보았다. 사회공헌부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총무팀이나 마케팅팀에서 부수적인 일 정도로 수행하는 우리의 경우와 많이 달랐다. 그때 느낀 게 많았다.

김병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있었으니 그런 게 보이는 것 아닐까?

정경선: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닌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하면, 소위 '못 노는' 찌질한 타입의 아이였다.(웃음) 친구들도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그런 아이들이었다. 집안 배경이 있어 그런지 맞지는 않았다. 그러나 친구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해 선생님들조차 '맞는 놈이 못난 놈이지. 공부나 해'라는 분위기였다. '왜 이런 일에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거지?'라고 고민을 많이 했다.

김병준: 우리 사회 전체의 분위기도 그렇다.

정경선: '사람이 잘나고 못나고에 따라 철저히 짓밟고 짓밟히는 사회가 되겠구나.' 공감 능력이 크다고 그럴까, 그렇게 느꼈다. 게다가 외환위기 때 주변의 기세등등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일종의 공포감 같은 것도 있었다는 말이다. '누구나에게 저런 순간이 올 수 있고 나도 저럴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병준: 그런 경우면 대체로 혼자 더 단단한 벽을 쌓는다. 돈도 더 지독하게 모으고, 그래서 자기만의 안전망을 구축하려 한다.

정경선: 지금 당장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벌어 앞가림해야 할 상황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것 아닐까?(웃음)

김병준: 또 하나, 이런 일을 아예 전업으로 하고 있다. 큰 기업을 경영하는 집안의 외동아들 아니냐. 신기해 보일 수 있다.

정경선: 처음에는 메세나(Mesenat), 즉 기업에서 문화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너무 간접적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보다 직접적인 활동으로 사회초년생들과 대학생들이 재능기부를 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했다. 하지만 이 역시 본업이 아니라 부업으로 하는 일이라 한계가 있었다. 여전히 갈증을 느꼈고 결국 이렇게 되었다.

김병준: 운영하고 있는 루트임팩트 이야기인데, 이름에서 임팩트 투자인 건 알겠다.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면서 돈도 좀 벌자는 것 아니냐?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나?

정경선: 먼저 루트임팩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소개했으면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의(善意)가 있다고 믿는다. 사는 게 급해 이기적인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공동선을 위해서 노력하는 잠재력이 있다고 보는 거다.

김병준: 그래서 그런 선의가 발현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보다 많은 체인지 메이커들(change makers), 즉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혁신가들과 함께?

정경선: 그렇다. 그래서 이런 체인지 메이커들을 발굴하고 육성하고 지원하는 일을 한다.

김병준: 체인지 메이커를 위한 체인지 메이커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정경선: 먼저 사회변화와 혁신에 대한 영감을 나누는 일을 한다. 체인지 메이커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체인지 메이킹의 의미와 성공적인 사례 등을 서로 나눈다. '이런 일도 있구나' '저렇게 해야 되는 구나' 하는 것을 서로 느끼고 배우는 거다.

김병준: 이 건물과 공간, 즉 디웰(D-Well)이 있는 의미를 알 것 같다.

정경선: 1층 개방형 카페에서 같이 쉬면서 이야기하고, 지하의 모임 공간과 도서관에서 토론하고 책을 본다. 때로 좋은 분들을 모셔 강의를 듣기도 한다. 그리고 2, 3층은 주거 공간이 필요한 체인지 메이커들의 숙소다. 저렴한 임대료로 임대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같이 보고 생활하면서 서로를 응원하고 영감도 나눈다. 이렇게 해야 지치지 않는다.

김병준: 같이 모일 수 있는 카페 같은 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 같이 쳐다보며 일할 수 있고, 게다가 숙식까지 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인상적이다. 지금 몇 명이 거주하고 있나?

정경선: 약 20명 정도이다. 내년이면 상황이 좀 더 좋아질 질 것 같다. 바로 이 근방에 연면적 약 6천611㎡(2천 평), 500명 정도가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셰어 오피스, 즉 공유 사무공간 개념이다. 회계와 재무, 세무 등의 업무처리도 지원할 생각이다. 그렇게 하면 이들이 본업에 보다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병준: 대담한 발상이다.

정경선: 이런 일과 함께 교육과 훈련도 한다. 사실 사회적기업이나 비영리단체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청년들이 많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고, 또 시작한다고 해서 업무 역량이 바로 생기지도 않는다. 이들을 위한 일을 하는 거다.

김병준: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려주는 것부터가 중요할 것 같다.

정경선: 이런 일을 하고 싶은 청년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교육 플랫폼을 만들려고 한다. 구글(Google)의 지원을 받았는데, 내년에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김병준: 정말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모두 돈이 필요한 일인데 그 돈은 어디서 오나?

정경선: 솔직히 80%는 아버지의 사재로 운영된다. 시작 단계에서는 이런 돈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실험적인 일, 우수한 인재를 발굴해서 키우는 일 등은 사재가 큰 역할을 할 것 같다. 나머지 20% 정도는 JP모건, 구글, 그리고 현대자동차정몽구재단 등의 후원이나 지원으로 이루어진다.

김병준: 소셜 벤처(social venture)와 사회적기업에 투자도 하는 걸로 들었다.

* 편집자 주: 소셜 벤처와 사회적기업 모두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돈도 벌자는 취지의 기업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다만 사회적기업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공적 인정을 받는 기업이라는 의미가 강한 반면, 소셜 벤처는 정부 승인과 상관없이 스타트업 기업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정경선: 투자회사인 HGI(Holistic Growth Initiative)를 통해서 한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돈을 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투자를 해 줄 사람이나 금융기관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도 쉽게 뛰어들지 못한다. 이런 장벽 내지는 허들을 낮추어주는 게 목적이다.

김병준: 투자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사회적 가치? 수익성? 당연히 사회적 가치가 제일 중요한 조건일 것 같긴 한데?

정경선: HGI 자체가 '가치를 기반으로 삶'을 지향한다. 그래서 다양성, 포용성, 그리고 웰빙을 추구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벤처들을 지원한다. 하지만 재무적 성과를 낼 수 있고, 그래서 스스로 설 수 있는 벤처여야 한다. 물론 단기적으로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김병준: 돈이 계속 들어와야 투자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기준으로 HGI에 투자하거나 돈을 맡길 사람들이 많겠나?

정경선: 이 모든 것을 알고도 투자할 정도의 선의를 가진 기업이나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좋은 성과를 내는 사업들도 나오고 있다. 그만큼 사회적 가치에 투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다.

김병준: 잘 되고 있는 사업을 하나만 소개해 달라.

정경선: 매일신문이니까 생생농업유통의 소녀방앗간 식당을 소개하면 좋겠다. 청송에 있는 할머니들이 재배한 청정 농산물로 음식을 만들어 파는 청정 밥집 사업이다. 농산물을 생산하는 할머니들은 제값을 받고 편하게 팔아 좋고, 소비자들은 좋은 음식을 먹어서 좋다. 2014년 1호점을 연 것이 벌써 10호점까지 열게 됐다. 연매출도 2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김병준: 지금까지 투자한 사업이 몇 개나 되나?

정경선: 11개다. 또 지금 하나 검토하고 있는 게 있다.

김병준: 루트임팩트가 들어오면서 성수동 일대에 사회적기업과 소셜 벤처 클러스터(집적단지)가 생겼다.

정경선: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는 4, 5개 정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오면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불과 몇 년 만에 클러스터가 형성되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다.

김병준: 같이 모여 있어 좋은 점이 많을 것 같다.

정경선: 많다. 서로 돕고 배울 수 있어 좋다. 또 소속감과 정체성이 보다 확실해졌다. "성수동에 있습니다" 하면 '아, 그런 일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또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김병준: 문제는 땅값이다. 많이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있다고도 하고.

*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구도심이 번성하면서 땅값이 오르고 임차료가 상승하면서 원주민들이 내몰리는 현상을 말한다.

정경선: 처음에는 다들 모여서 이 지역이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지방자치단체와 잘 협의해서 노력하면 빠르게 상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땅값 상승을 노린 외부 투자자들이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덤벼들었다.

김병준: 돈이 많이 돌아다니는 게 문제다.

정경선: 성수동 자체가 젠트리피케이션이 잘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진작 올랐어야 하는 땅인데 교육환경을 우선시하는 한국 특유의 부동산시장 특성 때문에 오르지 않고 있던 곳이다. 그러던 것이 소셜 벤처가 몰려드는 식으로라도 개발 잠재력을 보이게 되니 불이 붙어 버린 거다.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한 해에 2.5배씩 올리고 있다. 임대차보호법도 소용이 없다.

김병준: 이 클러스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루트임팩트의 역할이 더 커져야겠다.

정경선: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하지만 몰려드는 상업자본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김병준: 앞으로 이 지역 외에도 지역사회를 바꾸기 위한 일을 하게 될 텐데 이번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다.

정경선: 그래서 선제적인 투자를 포함해 부동산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김병준: 무력감을 자주 느끼나?

정경선: 매일같이.(크게 웃음) 사회문제에 대한 공감 능력이 크고 욕심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리비아에서 살다 온 친구가 우울증에 시달렸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난민들이 탄 배가 뒤집혀 목숨을 잃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병준: 젊은 나이에 이미 많은 일을 했다. 힘든 상황에 이렇게 노력하는 분을 보니 기분이 좋다. 힘내시기 바란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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