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소통이다. 상대방과 나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일 뿐만 아니라 문화 형성과 전파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 길이 있어 문화가 유입'발전되고, 사람 간의 이동이 이뤄져 마을 간, 나라 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생긴 공식적인 길은 어딜까? 문경의 관음리와 충주의 미륵리 사이에 있는 하늘재(계립령)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왕이 재위 3년(156년)에 소식을 전하고 북진을 위해 길(하늘재)을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늘재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해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나아갈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이다. 또한 삼국시대의 격전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길을 통해 불교가 들어오고, 선진 문물이 보급되기도 했다.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하늘재를 통해 삼국통일을 꿈꿨고, 통일신라 말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넘어갔던 고개가 바로 문경 하늘재다.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주요 간선 역로(驛路)를 확보했는데, 이때 영남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이 바로 문경의 유곡역이다. 유곡역은 25개 이상의 속역을 거느린 영남에서 가장 큰 찰방역으로 자리매김했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는 여행 시에서 "유곡역은 과거 영남 사람들이 한양 길에 오르면서 문경새재를 넘기 전에 다 모였던 곳"이라고 읊고 있다.
그만큼 유곡역의 역할은 중요했으며 조선 후기까지 영남대로의 중심으로서 역할을 했다.
이러다 보니 노변에 주막도 자연스럽게 생겨나 구한말 문경 지역에 있었던 주막이 119곳이나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2천 년 영화를 누렸던 문경의 '길'은 20세기 들어 100년 암흑기를 겪게 된다.
문경시청 엄원식 학예사는 "안타깝게도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대전과 김천으로 노선이 정해져 20세기 100년 동안 문경은 교통 고립지로 전락했다. 과거 문경에서 한양까지 일주일 걸리던 게 김천을 이용해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면 사흘 만에 도착하니 문경의 길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새로운 길 '철도'는 문경의 '길 역사'에 치명타를 날렸고, 이는 경북 북부지역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문경의 2천 년 '길' 전통은 잠시의 멈춤뿐이었다. 21세기 들어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개통돼 문경의 '길'이 역사에 다시 등장하더니 지난 6월 정부의 '국가철도망 계획' 발표는 문경이 대한민국 길 중심으로 다시 서게 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문경의 멈춰진 길 역사가 철도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
문경 시민들은 "국가철도망 계획이 제대로 실행된다면 문경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 베이징, 파리, 런던까지 기차로 여행할 날이 그리 머지않았다. 이젠 절대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다"고 기뻐했다.
문경 시민들은 지금, 10년 후 문경역 역무원으로부터 런던 가는 기차표를 끊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