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어겨야 산다니

어겨야 한다. 아니 지킬 수 없거나 지키기 어려우니 어길 수밖에 없다. 자전거를 타보면 안다. 자동차처럼 법에 규정된 '차'이지만 도로를 마음 놓고 달리지 못한다. 흔히 규정을 어긴다. 도로는 목숨을 내걸 만큼 위험하다. 차량 질주와 경적 소리 등 압박 등쌀은 이길 수 없다. 인도가 최선이다. 보행자와 유모차, 오토바이 심지어 인도를 가득 메운 불법 주정차 차량의 틈을 비집고 말이다. 그야말로 곡예다. 출퇴근'등하교 때는 더욱 그렇다. 어린이와 노인 등 교통 약자들에게 죄스럽지만 어쩌랴. 어겨야 가계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니.

물론 인도나 도로에 자전거 길이 있기도 하지만 없는 곳이 더 많다. 죄인처럼 따가운 눈총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비좁은 길은 더하다. 그런데 행인들 표정은 무질서하게 인도를 점령한 차량에는 무표정이다. 오히려 자전거에 더 불만스러운 듯하다. 오죽했으면 일부 자전거 운전자는 아예 등 뒤나 등에 멘 가방에 '함께 써요'라는 커다란 글씨로 쓴, 양해를 구하는 문구를 달고 오가는 까닭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불법 주정차 차량에는 관대하다. 어쩌랴. 더 크게 어겨야 더 잘 살고 떳떳하게 행세하고 사는 세상인 것을.

특히 자전거의 어기는 강도는 복잡한 도심 인도보다 호젓하고 자연과 가깝고 사람 발길이 드문 도로나 흙길을 지날 때가 더욱 세다. 생명체 때문이다. 이런 도로나 길일수록 뭇 생명체가 자전거 바퀴에 깔려 해를 입는 경우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먹이를 구하려다, 혹은 먹이를 옮기다 그럴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숱한 이유로 이동을 하다가 비명횡사의 불운을 겪는 셈이다. 살핀다고 하지만 뭇 생명을 앗는 살생도 피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순리를 어기는 일이 다반사다. 슬프지만 어쩌랴.

이 땅의 자전거 이용자들이 겪는 죄스러운 세상살이 일부다. 이들처럼 뭇 백성들도 어쩔 수 없이 많은 것을 어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삶과는 다르게 세상을 어기며 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횡행하고 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고, 더 강한 힘을 부리는 사람들이다. 행정과 입법, 사법부 그리고 언론이라는 제4부의 권력자들이다. 어쩔 수 없이 어기는 백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 많은 부(富)와 더 많은 특혜, 더 강한 권력을 위해서다. 나라 꼴도 더 크게 어길수록 더 당당해지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대통령 뒤에 숨어 세상을 우롱하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법을 우습게 알고 어긴 여러 국회의원과 김수천 부장판사'김형준 부장검사, 큰 언론사의 간부 비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둘러싼 최순실 의혹에 이르기까지 갖고 누리고 힘 있는 그들의 온갖 어기는 꼴은 아예 부끄럼이 무엇인지조차 잊은 듯하다. 특히 우 수석은 오히려 세상을 깔보는 모양새다.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이들 행정 입법 사법 언론이라는 4개 부의 세상을 거스르는 꼬락서니는 지자체나 지방의회라고 어찌 다르랴. 어기는 일은 도긴개긴이다.

경북도청에서는 공무원 등 30여 명이 규정을 어기고 특혜 토지 분양을 받아 물의다. 울릉군에서는 경찰 간부와 군청 간부가 번갈아가며 1억원의 특혜를 누렸지만 누구도 책임졌다는 이야기는 없다. 경찰 간부는 승진까지 했으니 금상첨화다. 경찰과 군청 간부가 정상 행정을 어기는 일에 연루돼도 무사한 나라. 지방의회라고 예외겠는가. 봉화군 의원들은 예산을 금배지와 값비싼 의류 구입에 낭비해도 끄떡없다. 경찰 수사 결과도 없다시피 하다. 대구시의회 조성제 의원은 수십 년 불법 건축물로 억대 임대 수입을 올렸지만 별일 없다.

갖고 누리고 힘 있는 위에서부터 그렇지 못한 아래까지 모두 어겨야 사는 삶이다. 누굴 탓하랴. 어기면 이득이고 지키면 손해이니. 어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절이다. 함께 어기는 수밖에. 어겨도 아무렇지 않고 더 크게 어길수록 더 당당한 그런 세월이다. 그럼 이제부터는 도로에서 쫓겨나 어쩔 수 없이 인도를 다녀야 하는 자전거 운전자들이 그나마 덜 죄스러워해도 될는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