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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보이지 않는 그들, 이 오래된 징후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봤다. 생각보다 묵직했고, 놀라우리만치 흡사했다. 노인들로 가득한 공원, 큼직한 간판을 단 오래된 식당들, 허름한 여인숙들….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다른 도시인데 같은 지점을 공유하고 있는 어느 변방의 풍경, 이 도시에서 우리는 그 일대를 경상감영공원 그리고 향촌동이라 부른다.

조선시대 행정의 중심지였던 경상감영 근방은 일제강점기 이후 은행, 금융, 우체국 등이 있어 낮의 중심지가 되었고, 바로 옆 향촌동은 요정, 여관, 유흥주점 등이 들어서 밤의 중심지가 되었다. 1970년대까지도 '시내'라고 불렸던 곳이지만 점차 중심지가 교동과 동성로로 옮겨가면서 지난 시절의 공간이 되었고, 과거에 즐겨 찾았던 이들이 중년, 노년이 되면서 현재는 그들의 유흥 장소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원색적인 차림을 한 중노년층의 데이트 장면은 물론이고 심심찮게 격한 사랑싸움(?)이 목격되기도 한다. 한낮 카바레 댄스홀은 바깥 시간에는 관심 없다는 듯 빙글빙글 돌고 돈다. '피크타임은 오후 2시'라고 우스개처럼 말하는 이곳의 생태계는 현재 대중교통 노인 우대, 저렴한 식당들, 무료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원 같은 조건들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 누군가와 경쟁하기에는 늙고 밀려난 몸들이 주머니 수준에 맞춰 모여들고 일탈을 꿈꾸며 일종의 게토를 형성한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발랄한 심경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곳의 삶이 일탈이 아니라 일상인 사람들이 있다. 놀이가 아니라 일인 사람들이 있다. 섞여 있지만 속해 있지 못한 존재들, 공공연한 비밀들. 그들은 바로 우리가 흔히 '박카스 아줌마'라 부르는 여성들이다. '죽여주는 여자'인 '소영'의 또 다른 얼굴들이다. 미군기지촌, 룸살롱 등을 거쳐 더 이상 내몰릴 곳이 없는 그녀들은 공원 근처에서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성욕을 해결하고픈 노년 남성들을 상대로 일한다. 그렇게 이곳을 서성거리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달성공원 근처에서 마지막 벌이를 하다 무연고로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도시는 수많은 개인들의 욕망과 그 실현의 장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오랫동안 특정 상태에서 순환되지 못하고 반복될 때 산화하고 부패하기 마련이다. 사실 우리는 이를 모르고 있지는 않다. 언젠가부터 한낮의 공원은 어딘가 부담스러운 공간이 되어버렸고, 그곳과 마주하기 싫은 나머지 벤치의 방향마저 길이 아닌 공원 안쪽으로 돌려버렸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눈을 돌린다. 여기서 비가시화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는 전략이자 규범이다. 징후적인 것은 노인 성문화의 타락이나 '박카스 아줌마'가 아니라 그녀들에 대한 경멸과 질시이고, 그리하여 다시금 반복될 현재임에도, 우리는 그저 눈을 돌려 다른 것을 보기 원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한때 젊고 싱싱했던 그 공간, 그 사람들의 모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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