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본 국제정치학회에 다녀왔다. 한일병합에 관련(1904~1910년)된 조약들에 대한 합법성과 불법성을 둘러싼 논쟁은 해묵은 논란거리가 되어 있다. 이번 회의도 그 연장선상이었으나, 종래의 학설에 변경을 가해야 한다는 중요한 논의가 있었다. 러일전쟁 연구에 명성을 가진 메이조(名城) 대학의 이나바 치하루 교수의 주장이다.
종래에는 러일전쟁을 만주를 점령한 러시아가 한국을 침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한국이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의 안전이 위협을 받기 때문에 일본이 선택한 불가피한 조치로 규정했다. 일본으로서는 '조국방위전쟁'으로 미화되었으며, 한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치부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이 아니었다면 한국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황당 가설도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러시아는 전쟁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에 세력을 확대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이 의도한 준비된 침략전쟁으로 봐야 한다는 설이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러일전쟁 발발을 전후한 일본의 군사적 움직임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에서 얻은 결론이다.
일본은 러일전쟁 기간 중에 수만 명의 군대를 한국에 주둔시키고 군율(軍律)을 이용하여 실질적인 군정을 실시했으며(일본 육군성편 '명치37,8년 戰役陸軍政史' 제2권),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의 군사적 지배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는 러일전쟁부터이며, 그것도 의도된 군사점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한반도에서의 실질적 최고 권력자는 고종황제가 아니고 전시 비상대권을 가진 일본군 사령관이 된다. 따라서 러일전쟁 발발 이후 한일 간에 체결된 조약들은 일본의 군사적 강제성이 개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정당성 내지는 합법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독도 문제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1905년 2월 22일 일본은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했다.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주인이 없는(無主地) '도서를 다케시마라 칭하고 앞으로 시마네현의 소관(所管)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2005년부터 일본은 이날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해 놓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은 1900년 10월 25일 고종황제가 반포한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내세워 반박한다. 한국이 일본보다 5년 앞서 칙령을 통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인이 없는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한다는 시마네현의 고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은 칙령에 명기되어 있는 '석도'가 독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 시마네현 고시에 대해 한국이 왜 대항을 하지 않았느냐고 주장한다. 석도가 독도라는 사실은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다. 석도는 돌섬이며, '돌'의 사투리가 '독'이기 때문에 석도→돌섬→독섬이 되고, 독섬의 한자식 음차(音借)가 독도인 것이다. 왜 대항하지 않았느냐는 데 대해서는 일본이 고시 내용을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군사 점령하의 대한제국은 대항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대항을 해도 실효성이 없었을 것이라는 현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당시의 한일관계를 대등한 주권국가 간의 관계로 상정해서 이해해 왔다. 대한제국의 자율성을 존중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패러다임을 바꿔 재해석을 하면 보다 쉽게 문제가 풀릴 수 있다. 전시와 같은 군정체제하에서 체결된 한일 간의 조약들이 합법성을 가지기 어렵듯이, 같은 시기에 취한 일본의 독도 편입 조치는 정당하지도 않고 합법적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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