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간 어느 날 고추나 몇 개 따서 점심식사에 곁들여 먹을 요량으로 텃밭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전날까지도 멀쩡하던 고추 한 고랑이 줄기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고춧잎까지 훑어간 것이지요.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 사무직원에게 이야기해 보니 '그 할머니께서 다녀가셨다'고 했습니다.
그 할머니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텃밭의 호박잎과 깻잎이 새로 자라는 족족 잘려 나갔습니다. 한두 번은 누군가 맛있게 드셨겠지 생각했는데 연일 그런 일이 일어나니 누가 그랬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의문이 풀렸습니다. 치매를 앓고 계시는 할머니 한 분이 자기 밭이라고 생각하시고 호박잎도 따 가시고 깻잎도 따 가셨던 것입니다. 웃음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참 곱게 치매가 드셨구나.' 제 텃밭이 그 할머니의 추억의 놀이터가 되었다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할머니께서 다녀가신 흔적이 뜸해지면 혹시 편찮은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곤 했습니다.
우리 직원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터라 그 할머니께서 고춧잎을 훑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대신 다 훑지는 말고 좀 남겨 놓으시라고 했다는데 엊그제 가보니 나머지도 다 훑어가셨습니다. 그 할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합니다. "이기 얼마나 맛있는 건데 서리 맞으면 아까와서 우짜노." 방에 들어와서 달력을 보니 이슬이 차가워진다는 한로(寒露)가 지나고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비록 치매를 앓고 계셨지만 그 할머니께선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감지하고 계셨고 추수할 때를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이제 시월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전례는 일 년을 주기로 반복되는데 요즈음 미사 중의 성경 말씀도 추수나 종말의 내용들로 넘쳐납니다. 특히 교회는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하여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이나 친지나 지인, 그리고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11월은 우리 자신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묵상하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대구 교구청 성직자 묘지 입구 양편에 짧은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왼쪽엔 "HODIE MIHI"(오늘은 나에게), 오른쪽엔 "CRAS TIBI"(내일은 너에게)라는 라틴어 문구입니다. 단순하게 해석하면 '오늘은 나에게 죽음이 닥치고, 내일엔 너에게 죽음이 닥칠 것이다' 정도이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르게도 들릴 것입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꺼려합니다. 내일 나에게 일어날 일에 대하여 정확히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이지만 가장 확실한 것 하나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동반자와 함께 살아갑니다. 오스트리아에 잠시 머물렀던 시골 교회의 풍경이 그려집니다. 성당 뒷마당은 공동묘지로 꾸며져 있었는데 묘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게 단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유럽의 대부분 교회들이 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삶의 공간 한가운데 죽은 자들의 공간인 묘지가 자리한 셈이지요. 성당을 드나들면서 묘지를 둘러보는 어르신들과 묘지 사이를 뛰어다니며 노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노래가사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향한 희망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는 신앙 속에서 삶을 완성한 선배들의 우리를 향한 초대입니다. 또한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기에 나날을 충실히 살라는 선배들의 충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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