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광해, 그리고 박근혜

서울대 의대 졸업. 서울대 의대 박사(기생충학 전공)
서울대 의대 졸업. 서울대 의대 박사(기생충학 전공)

"지금 CJ가 만드는 영화가 뭔지 알아? 왕이 있는데 그 왕이 사실은 가짜라는 거야."

방송국 PD로 일하는 지인은 영화 '광해'를 그렇게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고 이맹희 씨는 삼성가의 장남이었지만, 삼성을 물려받은 건 3남인 이건희 회장이었다. 이맹희 씨 측으로선 이게 못내 속이 상할 만하다. 그래서인지 이맹희 씨는 늘 이 회장과 대립했는데, 선대인 이병철 회장이 남긴 삼성 비자금에 대해 자신도 상속권이 있다며 소송을 낸 것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맹희 씨의 장녀이자 CJ 부회장인 이미경 씨는 그래서 '삼성그룹의 진정한 후계자는 이맹희고 이건희는 가짜다'라는 취지의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고 싶었고, 그게 '광해'가 탄생한 비밀이라는 것이다.

'영화가 개봉되면 한바탕 논란이 되겠구나' 했는데, 영화가 천만 관객을 향해 흥행몰이를 하는 내내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영화를 보면서 이맹희와 이건희의 관계를 떠올리는 건 도대체가 말이 안 됐다. 오히려 영화 속 이병헌이 분한 '광해군'은 그로부터 3년 전 정권의 핍박에 목숨을 잃은 노무현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대체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뭐라? 이 땅이 오랑캐에게 짓밟혀도 상관없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 그깟 사대의 명분이 뭐길래 2만 백성을 사지로 내몰라는 것이오." 명대사로 회자되는 이 말도 왠지 노무현이 평소 하던 말처럼 들린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 경영 일선에 있던 이미경 부회장의 퇴진을 요구한 것도 역시 '광해'와 '변호인' 등 노무현을 띄우는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CJ를 찾아가 "VIP의 뜻" "너무 늦으면 난리 난다"며 퇴진을 종용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결국 이 부회장은 지병 치료를 이유로 미국에 감으로써 정권의 압력에 굴복한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럽다. 박 대통령은 허수아비고 실제 국정을 좌지우지한 자는 최순실이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넋이 나갔다. 전통적인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는 바람에 콘크리트 같던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5%대로 추락했다. 이 사태를 겪고 나자 '광해'가 다시 보인다. 진짜 왕은 따로 있다는 '광해'의 메시지가 '박근혜 뒤에 최순실이 있다'는 현실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CJ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영화를 만들었을 리 없겠지만,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어쩌면 이렇게 미래를 예측했을까, 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광해'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는 건 이렇듯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광해'는 재미있는 영화다. 일본 네티즌들도 이 영화에 기꺼이 찬사를 바쳤는데, 그건 영화의 의도가 무엇이든 관객이 즐길 수 있도록 흥미진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역사책에 나오는 문장 한두 줄에 상상력을 입혀 이런 대작을 만들었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정권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이후 CJ는 더 이상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 그 이후 CJ가 만든 '국제시장'을 극장에서 봤다.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봤다는 박 대통령과 달리 난 '내가 왜 이런 영화를 돈 주고 본단 말인가!'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 뒤 CJ가 만든 영화가 '연평해전'이라니, 한국판 '픽사'가 될 수도 있었던 영화사가 한없이 몰락하는 광경이 못내 아쉽다.

영화는 상상력의 결정체로, 그 상상력에 제약이 가해지면 좋은 영화가 나오기 어렵다. 많은 관객이 즐거워하는 영화 대신 자신만 즐거운 영화를 만들기를 원하는 대통령이라니, 문화에 무지한 대통령을 갖는 건 국민에게 비극이다. 그 무지가 문화에 국한된 게 아니라는 것이 더 큰 비극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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