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국채보상운동 장편소설 작가 공모'에서 소설가 엄창석 씨를 선정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한 주권수호운동으로 서상돈이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천300만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된 민족운동이다. 엄창석 작가는 국채보상운동을 주제로 한 작품을 2017년 1월부터 6월까지 매일신문 홈페이지에 연재하며, 연재가 끝난 뒤에는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역사적 사실 바탕으로 현대화
엄 작가는 국채보상운동을 주제로 한 작품 '새들의 저녁'(가제)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현대적으로 쓰겠다고 밝혔다. 역사적 공간과 지명, 당시 사건 등을 세심하게 따라가되 의식의 흐름이나 언어는 현대적으로 표현해 독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 그대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해 보여줄 생각입니다. 100년 전 인식의 틀을 그대로 표현할 경우 현대 독자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점도 있을 것이고, 100년 동안 '상식의 간극'이 있는 마당에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오히려 '진실'을 가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국채보상운동의 핵심 인물은 서상돈, 김광제, 박해령 등이다. 그러나 '새들의 저녁'에서 이들은 서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의 흐름을 결정짓는 정신적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청년 임계승과 앵무 염농산 등 핵심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이 곧 서상돈, 김광제, 박해령 등 주요 인물들의 생각인 것이다.
◆서상돈은 시대를 정확히 읽은 인물
국채보상운동은 '빚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할 수는 없다'며 대구시민들이 일으키고 전국적으로 확산된 운동이다.
엄 작가는 "국채보상운동이 표면상 빚을 갚자는 형태로 나타났지만, 이를 주도한 서상돈은 자본의 폭력성, 자본의 미덕과 무서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대부분 일제에 대해 무력저항, 교육저항 등으로 대항했지만, 서상돈은 일본의 침략 본질이 '자본적'이었음을 알았다. 그가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은 단순히 빚을 갚자는 차원을 넘어 자본과 자본의 충돌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서상돈의 국채보상운동 전개를 '매우 독특한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엄 작가가 이번 소설에서 국채보상운동과 함께 '대구읍성 허무는 모습'을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다루는 까닭이기도 하다. 대구읍성 사수와 허물기는 그야말로 '봉건 왕조'와 '제국주의 상업국가'의 충돌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전장인 것이다.
엄 작가는 서상돈이 조선의 일반적인 지식인들과 달리 '자본'에 빨리 눈을 뜨게 된 것은 젊은 시절부터 보부상을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보부상으로 거상이 되었고, 미미한 인물에서 큰 인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본의 다양한 속성'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친일논란은 단편적인 인식
엄 작가는 국채보상운동을 주제로 소설 작품을 쓰면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 '서상돈의 행보'에 대한 판단이라고 했다. 일부에서는 서상돈의 친일행적을 지적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친일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엄 작가는 "친일과 협일은 애매한 부분이다. 명쾌한 답을 원하는 사람들은 '○ 혹은 ×'로 간단히 규정하고 싶을 테지만 간단치 않다. '○ 혹은 ×'로 선을 긋는 것이 오히려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 당시 작성한 수 없는 취지문을 검토해보면 이 운동의 중심인물은 서상돈임이 분명하다. 그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서상돈을 지지했던 것은 서상돈의 진심을 신뢰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안창호, 신채호 등이 주도했던 항일독립운동단체 '신민회' 조직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서상돈은 일본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믿었고, 그 과정에서 접촉하고 협력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고 평가한다.
◆인물을 어디까지 풀어둘 것인가 고민
엄 작가는 '새들의 저녁'에서 서상돈이라는 인물을 그 이름 그대로 해야 할지,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서상돈'이라는 인물이 존재했는데, 다른 이름을 쓰자니 걸리고, 그렇다고 '서상돈'이라는 이름으로 가두자니 행동이 굼뜨고 생동감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의 한계'를 깨달아가는 모습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극적인 장치가 필요한 부분이다. 또한 그가 거의 전 재산을 가톨릭에 기부하기까지의 과정을 '드러난 사실 그대로'만 표현할 경우 현실성이 다소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새들의 저녁'은 200자 원고지 1천 매 분량으로 집필될 예정이며, 1906년 10월부터 1907년 7월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대구의 거리, 풍물, 인물들을 재현하되, 민족자본과 침략자본의 충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주요 등장인물은 임계승, 앵무 염농산, 서상돈, 이와세, 서병오, 김광제, 서병조, 박중양, 한유, 오두라, 허위 등이다.
◆"日 외채 갚고 주권 회복" 1907년 대구서 제안한 국채보상운동
1904년 고문정치 이래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했다. 통감부는 이 차관을 한국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경찰기구의 확장 등 일제 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에 충당했다. 당시 한국정부의 세입 액에 비해 세출 부족액은 77만여원이나 되는 적자예산이어서, 거액의 외채상환은 불가능한 처지였다.
국채보상운동은 나랏빚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의 명칭을 대동광문회라 개칭하는 특별회에서 회원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의, 참석자 전원의 찬성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하여 발표하면서부터다.
발기인은 서상돈을 비롯하여 김광제, 박해령 등 16명으로, 이들은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전 국민의 호응으로 서울에서는 김성희, 유문상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치해 운동을 본격화했으며,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 각종 신문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극력 탄압 금지했으며, 매국단체인 일진회의 공격과 통감부에서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의 방해로 인해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소설가 엄창석은?
엄창석 작가는 1961년생으로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중편소설 '화살과 구도')로 등단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장편소설 '빨간 염소들의 거리'(민음사)를 비롯해 '슬픈 열대'(민음사), '황금색발톱'(민음사), '어린 연금술사'(민음사), '비늘 천장'(실천문학사) 등이 있다. 제22회 이상 문학상 우수작상, 제20회 한무숙 문학상, 제29회 금복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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