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내리막길에 선 두 여인

경북대(국문과) 졸업. 창조문예 시 부문 등단
경북대(국문과) 졸업. 창조문예 시 부문 등단

힐러리 클린턴은 필자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차파쿠아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 동네에서 클린턴의 인기는 대단하다. 그녀가 선거에 패한 다음 날, 절망감에 빠진 타운 고등학교 방송반 학생이 아침 조회시간에 국기에 대한 맹세(The pledge of Allegiance)를 하면서 "I will not"이라고 문장을 고쳐서 낭독하며, "더 이상 자신은 미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방송해 버렸다. 당황한 교장 선생님이 다시 마이크를 잡고 선거 결과로 인해 실망한 학생들에게 "힘들지만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고 학생들의 마음을 달랬다.

선거가 치러진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엉뚱한 후보였던 트럼프를 새 대통령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듯, 반(反) 트럼프 시위로 여러 도시들이 들썩거리고 있다. 트럼프의 발 빠른 백악관 입성을 위한 행보도 주의를 끌고 있지만, 엄청난 부담과 긴장 속의 긴 여정을 달리고 패자의 자리에 다다른 클린턴의 근황도 연일 세간의 관심이 되고 있다.

클린턴은 대선 패배라는 성적표를 받아 든 후, 국민들에게 "트럼프에게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그에게 미국을 이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고통스럽고 이 고통이 오래갈 것이다"라고 하며, 지지자들에게 "승리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인간적인 아쉬움을 전했다. 아픈 현실 앞에서 보여준 그녀의 의연하고 정중한 모습은 지지자들에게는 물론 반(反) 클린턴 세력들에게까지 큰 감동을 안겨 주었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일 연속 역사드라마를 보고 있다. 연일 방송은 청와대라는 깊숙한 궁궐 속에서 일어난 대통령과 측근들의 비리를 공개하고, 국민들은 거기에 주연으로 출연 중인 대통령을 향해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소리치고 있다. 조만간 대통령은 끝까지 버티든, 하야하든, 탄핵을 받든 그 어떤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인생길을 걷다 보면 이처럼 실수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자존심 상할 수도 있고, 외로울 수도 있고, 억울할 수도 있는 그런 내리막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지미 카터 대통령은 가장 초라하게 백악관을 떠나야 했다. 당시 극심한 경제 문제와 이란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실패와 무능함이란 꼬리표를 달고 물러났다. 그는 한동안 심한 외로움과 패배감으로 고통을 겪다가, 자신의 작은 도움이나마 기다리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시작으로 세계의 인권 증진을 위해 헌신하며, 재난과 전쟁으로 신음하는 지구촌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위로하였다. 그는 2002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뉴욕타임스는 그를 퇴임 후 가장 멋진 활동을 보여준 미국 대통령으로 평가했고, 워싱턴포스트(WP)도 그를 미국 전직 대통령 중 가장 품위 있는 롤모델로 꼽았다. 그는 정상의 자리에서보다 내리막길에서 꽃을 피웠던 것이다.

이제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과 미국의 클린턴, 두 여성 리더들은 각자의 내리막길에 서 있다. 낙선 후 차파쿠아의 산책로를 강아지와 거닐며 아픔을 달래는 클린턴도, 청와대에서 칩거하며 수많은 경우의 수를 저울질하고 있는 박 대통령도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산이 높을수록 내리막길이 더 가파르듯, 대통령이란 자리와 같이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는 길은 더 험난하고 두렵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내리막길에서도 겸손과 진정성을 보이는 발걸음을 옮긴다면, 많은 사람들은 손을 내밀어 이들을 부축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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