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간 그림만 그려온, 그림밖에 모르는 변미영 작가가 책을 냈다. '붓' 대신 '펜'을 잡은 것이다. 어린 시절 글쓰기의 중요성을 배운 그는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엿보다 멍석을 펴주자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최근 펴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는 미술현장에서 겪는 갈등과 고민, 즐거움, 그리고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변 작가는 "다음 번 책은 에세이가 아닌 나의 작품 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코를 찡긋하며 웃는 모습만 영화배우 김혜수를 담은 변미영 작가를 그의 화실(대구 수성구 범어동)에서 만났다.
◆나만의 비밀 정원 '화실'
변 작가는 담쟁이덩굴이 담벼락을 덮고, 정원엔 야생화가 곳곳에 피어 있는 화실에서 하루종일 보낸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돼 있는 화실은 낮에는 따스한 햇살을, 저녁에는 붉은 노을을 감상할 수 있다. 그의 '비밀 정원'인 셈이다. 그는 직장인처럼 아침에 출근해 해가 지면 퇴근한다. 1년 365일 가운데 300일 넘게 이곳에서 보낸다. 화실 안은 작품들과 수많은 물감 통, 크고 작은 조각칼들로 가득하다. 화실 중간에는 작업이 지루하거나 잘 안 되면 타는 그네가 매달려 있다.
"직장인들처럼 매일 화실에 나옵니다. 직업이 화가잖아요. 남들처럼 일을 합니다. 하지만 휴일에는 쉽니다. 남편과 드라이브를 하거나 맛있는 음식도 사먹는 등 즐겁게 보냅니다. 시간이 나면 여행도 하고."
◆'樂' '花' '遊' '休' 등 산수 시리즈 주목받아
변 작가는 산수(山水)를 주제로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펼쳐 왔다. 작품의 주제를 산수로 택한 것은 동양화를 전공한 영향도 있지만 노장사상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낙(樂)산수' '화(花)산수' '유(遊)산수' '휴(休)산수' 시리즈로 평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새와 산, 꽃이 공통된 모티프로 나오고 다소 추상화된 구도 속에서 자연의 요소들이 어우러지는 그의 그림은 환상적이면서도 온화하고, 어두운 듯하면서도 몽상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다.
"나는 산수를 즐겨 그리는 화가입니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산수는 인간이 몸을 의탁할 수 있게 합니다. 산수는 인간을 감싸주며 그 속에서 자유로이 노닐게 합니다. 나는 산수를 끊임없이 갈망하지만 산수실경에 직접 발을 디디며 화첩을 들고 다니는 진경 산수화가는 아닙니다. 내게 산수는 요람과 같습니다. 늘 산수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꿈을 꿉니다. 꿈꾼 것을 한 장면 한 장면 화면에 채워갑니다."
그의 작업은 고되기도 하지만 오래 걸린다. 합판 위에 아크릴물감으로 10여 회 이상 다양한 색의 물감을 올리고 이를 드로잉하며 긁어낸다. 긁어낸 자국으로 그림을 그린다. 여기에 또다시 아크릴물감을 칠하고 닦아내는 것을 수십 차례 반복한다. 그리고는 쌓아 올린 색층들을 긁어내면서 형상을 그린다. 그런 형상 위에 다시 수십 번의 색의 흔적을 만들어 쌓아 올린다. 물감을 덧칠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색을 품은 오묘한 색이 만들어진다. 그런 이유로 화면의 이미지는 감상자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게 한다. 반복되는 힘든 작업과 오랜 시간으로 작가의 몸은 고되지만 작품은 깊이를 더한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작업'이라 합니다. 작업은 육체적'정신적 일을 지창하지만 작업이라는 단어는 육체적인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저는 매우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꼬박 1년을 바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다작(多作)을 한다. 변 작가의 일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미술은 '늪'이다
변 작가는 미술을 '늪'이라고 정의했다. "미술은 늪입니다.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깊이 빠져듭니다. 그래서 화가가 됐어요." 그는 이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색이나 형상 등의 조형언어로 자신 속에 내재된 다양한 의식층을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써 예술 활동은 진정한 자아 발견의 지름길이기 때문에 나는 화가가 된 것이 매우 행복합니다."
변 작가는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 또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미술품 감상은 작품의 의미와 작가의 의도를 발견하는 동시에 간접경험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을 찾아 좇다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내면화 작업과 연결된다고 했다. 또한 시대적'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자신의 사회적 존재와 삶의 위상을 검토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고 했다. "이렇듯 미술의 늪은 넓고도 깊어 빠져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습니다."
◆위작은 모작이나 임작, 방작과는 달라
변 작가는 위작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 번은 컬렉터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어떤 전시장에서 저의 그림을 베낀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변 작가는 그 화가의 도록을 구해 보았다. 자신의 작품에서 모방된 부분이 많았지만 위작으로 취급하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다른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따라 그리거나 그 기법을 모방한다는 사실에 묘한 만족감을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느긋했다. 작업과정이 까다롭고 세밀한 단계를 많이 거치기에 자신도 똑같은 작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위작은 다른 사람의 작품을 승낙 없이 베끼거나 비슷하게 만든 것으로, 주로 진품으로 만들기 위해 똑같이 만든 가짜 작품을 말합니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에서는 공부법의 하나인 '모작'과 '임작'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이를 거치면 '방작'의 단계로 나아가는데, 이러한 일련의 수련 과정은 예술세계와 정신을 흠모하고 체득하기 위함이므로 위작의 목적과 전혀 다릅니다."
◆내 작품 보고 행복해졌으면…
변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무한한 상상을 하면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중국 진나라 승려 지도림이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대해 '세상 만물은 크고 작음이 비록 다르나, 사물이 스스로 자리를 지키게 되면, 사물은 곧 천성을 따르는 것이 되며, 모든 일은 사물의 능력에 따라 이루어지고, 사물은 각자의 분수에 합당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소요'라고 해석했듯이, 나도 만물이 스스로 자리에서 스스로 깨달아 만족하는 세상을 꿈꿉니다. 나는 그 세상에서 유유히 거닐며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낙토, 곧 이상향)의 세상을 계속 그릴 것입니다."
◇화가 변미영은?
계명대 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대구대에서 조형'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산수(山水)를 주제로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펼쳐 왔으며, 30여 년간 일관되게 작업해오면서 '낙(樂)산수' '화(花)산수' '유(遊)산수' '휴(休)산수' 시리즈로 평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현재 계명대 미술대학과 교육대학원에서 학생들에게 한국화를 가르치고 있다. 개인전 및 초대전을 25차례 가졌으며, KIAF, SOAF, SAF, 마이애미, 상하이, 요코하마 등 다수의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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