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모습들이 무대에 등장한다. 휠체어에 앉은 둔카노(원작의 덩컨) 왕, 조폭 부하들을 거느린 두목 맥베드, 링거를 꽂은 맥베드 부인과 간호사들, 폴리스라인과 군중….
서울시오페라단이 지난 24일 20여 년 만에 다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린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드'는 요즘 연일 뉴스를 도배하는 정치 사회적 상황을 마치 뉴스 장면들처럼 보여준다. 극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강렬한 풍자화였다.
이번 공연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연출가 고선웅의 첫 오페라 연출이어서 화제를 모았다.
베르디의 '맥베드'는 11세기 스코틀랜드의 국왕 시해사건을 다룬 음산한 내용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밝고 경쾌한 음악이 주조를 이룬다. 그래서 내용에 맞게 무겁고 어두운 연출을 하게 되면 음악이 그 분위기와 어우러지지 않는 독특한 작품이다.
고선웅은 이 점에 착안한 듯, 이제까지 국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머러스한 연출로 음악과의 조화를 시도했다. 일본의 간사이 니키카이오페라단이 2013년 도쿄 분카카이칸에서 한 '맥베드' 공연에서 독일 연출가 페터 콘비츠니가 보여준 기발한 유머 감각의 한국판이었다.
필로폰을 연상시키는 백색 가루와 피가 시선을 사로잡은 공연 포스터대로, '맥베드'는 알코올과 마약에 취해있고 맥베드 부인과 궁정 신하들, 귀부인들도 마찬가지다.
권력과 부를 끝없이 욕망하는 탐욕사회, 그리고 권태를 잊기 위해 더욱 강한 자극과 도취를 열망하는 중독사회를 무대 위에 구현한 성공적 시도였다.
특히 하나의 막 안에서 장이 바뀔 때 장면이 단절되지 않고 매번 앞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만든 아이디어들이 탁월했다.
예를 들면, 2막 2장에서 맥베드의 동료 장군인 반코(뱅코우)는 맥베드가 보낸 자객들에게 암살당한 뒤 스스로 일어나 피를 상징하는 붉은 천을 두른 채 2막 3장의 연회가 시작되길 무대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
다만 연출가 자신이 셰익스피어 원작을 토대로 새롭게 연출한 극 '칼로 막베스'와 기본 콘셉트가 유사하다는 점에서 오페라란 장르 특성에 집중한 완전히 새로운 해석은 아니었다고 본다.
무대디자이너 이태섭과 영상디자이너 이원호는 프로젝터를 탑재하고 움직이는 대형 스크린 세 개로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무대 벽들을 만들어냈다. 언제나 연출가를 고민시키는 '버냄의 숲이 움직이는 장면' 등도 너무 쉽게 보일 정도로 간단히, 그러나 효과적으로 해결되었다.
오랜 공백을 깨고 오페라 지휘자로 돌아온 구자범과 오케스트라 디 피니의 호흡은 놀라울 정도로 정밀했다.
섬세하게 공들인 서곡 연주는 관객을 단번에 음악에 집중시켰다. 지휘자는 음의 길이를 자유롭게 신축하는 '템포 루바토'를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구사해 종종 관객의 귀를 각성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의외의 요소는 청중이 더욱 음악에 몰입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베르디 '맥베드'의 음악에 익숙한 감상자들은 가끔은 과장으로 느낄 법한 부분들도 있었다.
1막 마녀들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합창 장면의 템포는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해 목관이 완벽하게 따라가기에 숨찰 정도였다. 피트를 평소보다 높여 오케스트라 소리가 더욱 잘 전달되게 만들었는데, 때로는 타악기가 너무 크게 울려 전체적인 밸런스가 부자연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맥베드 역의 바리톤 양준모는 섬세한 약음까지 귀에 정확하게 꽂히는 명료한 발음과 발성, 부드러움과 강함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변환하는 유연한 가창, 역할에 어울리면서도 과장이 없는 자연스러운 연기 등으로 거의 나무랄 데 없는 맥베드를 보여주었다.
다만 그의 기품 있고 정제된 연기는 맥베드가 조폭 두목처럼 등장하는 연출 콘셉트의 희극성과는 약간의 괴리가 있었다.
맥베드 부인 역의 소프라노 오미선에게는 이 배역이 다소 무리인 듯했다.
베르디의 '맥베드'에서 맥베드 부인 역은 엄청난 고음과 파워 및 테크닉을 요구하는 고난도의 배역이어서 전 세계에서도 잘 불러낼 수 있는 가수가 많지 않다. 오미선은 이 악역을 악역다운 표현력으로 소화해내며 최선을 다했지만, 폭발하는 고음도 사악한 무게감을 주는 중저음도 충분치 않아 안타까웠다. 하지만 4막에서 손을 씻으며 부르는 몽유병의 아리아는 관객들에게 처연한 감동을 안겼다.
반코 역의 베이스바리톤 최웅조는 풍성한 저음과 아름다운 음색으로 죽기 직전의 아리아를 불러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 막두프(맥더프) 역의 테너 신동원은 죽은 자식들을 애도하는 아리아에서 넘치는 성량과 시원한 고음을 들려주었으나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 만한 섬세한 표현력이 아쉬웠다.
이밖에 작은 역이지만 왕자 말콤을 노래한 테너 이상규는 단번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 있고 명징한 발성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스칼라 오페라 합창단과 메트 오페라 합창단이 함께한 대규모의 합창은 박진감 넘치는 지휘에 호응하며 4막의 합창들을 감동적으로 전달했다.
공연은 김태현, 정주희 주역의 더블캐스트로 27일까지 이어진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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