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해안'이란 뜻을 가진 백인 국가라는 정도로만 배웠던 중앙아메리카의 코스타리카란 나라에 30년 전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집집마다 다른 색깔의 작은 깃발이 달려있는 게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을 표시하는 것이란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잡혀갈까 눈치 보던 유신시대와 사회적 갈등이 극심하고 최루탄 눈물로 날을 지새우던 살벌한 5공화국 정치판을 보며 20대 젊은 시절을 보냈던 나로서는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다.
코스타리카는 여느 중남미 나라들처럼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군사독재와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이 심한 나라였다. 그러나 1949년 '일종의 쿠데타'로 집권한 피게레스는 군대를 해산하고 여자와 문맹자, 소수 흑인에게 참정권을 주고 전면적인 의무교육을 보장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대통령 자리는 당연히 그의 것이었으나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물러났다. 이후 새로운 민주 헌법이 만들어지고 코스타리카는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많이 겪었던 여타 중남미 국가와 달리 안정된 사회망을 구축한 나라가 되었다. 이런 초석을 놓은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어 후에 두 차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그 아들까지 대통령이 되었다.
이런 기틀을 닦아놓은 지 60년이 지난 지금의 이 나라를 다시 조망해본다. 교육 분야에 전 국가 예산의 30% 이상을 투자함으로써 인력 개발지수가 중남미 1위를 달리고 있고, 문맹률은 제로에 가깝다. 평균수명은 80세에 이르고, 국토의 25%를 자연보호 구역으로 지정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벌써 10여 년 전에 산림녹화 100%라는 놀라운 기록을 달성하여 우리보다 몇 발 앞서서 녹색 성장국이 되었다. 국토 면적은 남한의 절반밖에 안 되지만 동식물의 종류는 전 세계의 5%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생태 보존국이다. 금연 정책도 엄격해 선진국 수준이다. 이러니 지구상 200여 국가 중에서 유엔에서 제시한 친환경 정책 지표 5개를 모두 달성한 유일한 나라가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정치적 안정에 보태서 이런 인프라를 갖게 되니, 자연 관광자원 순위로 세계 6위이고, 인구 450만에 불과한 이 나라의 관광산업 경쟁력 지수는 2억 인구의 브라질을 제쳤으며 중남미에서 1억 인구의 멕시코 다음으로 높다. 의료관광과 생태관광에서 최고 수준이니 그럴 만하다. 이 결과 전 국민의 85%가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고 하며, 에너지 사용량의 99%를 재생 가능한 자원으로 충당하는 나라가 되었다. 혼란한 중미 지역의 분규를 해결한 공로로 노벨평화상 수상 대통령을 배출했고, 유엔 평화 대학의 본부가 있는 나라로 성장하였다.
지난 10월에 현 솔리스 대통령이 국빈으로 내한하여 자국 독립기념행사를 서울 모 호텔에서 가진 적이 있다. 아무리 작은 나라이지만 일국의 국가원수인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참석한 사람 누구에게나 사진 촬영에 응해주고, 심지어 끝까지 남아서 조그만 리셉션 스탠드 테이블에서 머리를 맞대고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대통령은 2년 전 취임하자마자 국가 기관에 자신의 사진을 걸지 말 것이며, 모든 공공시설물에 자기 이름을 표방하지 말라는 정식 행정명령을 내렸다. 모든 공공재는 국민의 것이지 특정 대통령의 것이 아니란다. 주권재민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60년간 단 한 차례 혼란도 없이 정확히 4년마다 대통령을 뽑아왔고, 대통령 국외 출장 시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국민 친화적인 자세, 그리고 소통하는 모습에 진정한 선진국은 반드시 국민소득 수준으로만 가늠할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보면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의 수준은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과거 정권에서도 강제 모금했는데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며 우겨대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친박 그룹이나, 이 혼란상을 기회로 대권 꿈을 앞세우는 소위 잠룡 그룹, 또 이쪽저쪽 눈치 보며 책임을 회피하는 국회의원 모두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 눈에는 개혁 대상이다. 우리도 좀 '국민이 행복한 민주주의'를 누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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