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집에 갔더라면
작은아버지는 몸피가 작았어. 일제강점기에 강제 노역에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하고 귀국했어. 결혼은 하였지만, 술을 워낙 좋아한 탓에 숙모에게 미움을 샀어. 그날도 하양장에서 막걸리를 거나하게 드시고 질구디에서 친구 몇 명과 이 차로 마셨어. 술기운에 기분이 좋았겠지.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비들에게 붙잡혔어. 놈들에게 이끌려 한육만 씨 집 근처에서 칼을 맞고 돌아가셨어.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와 나는 현장에 갔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어. 창자가 밖으로 쏟아져 시신을 제대로 수습할 수 없었어. 담요로 감싸 큰집으로 옮겼지.
다른 사람들은 바로 장례를 치렀지만, 삼촌은 바로 장례를 치르지 못했어. 숙모가 돌아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신랑이 오죽 애를 먹였으면 그랬을까? 숙모가 야속하더군. 겨우 설득하여 장례를 치렀어. 숙모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어. 평생을 혼자 살았지. 죽고 난 뒤에 새로운 정이 생겼는지, 아니면 삼촌이 불쌍해서일까.
"사건 전후로 마을 분위기는 어떠했는지요?"
"공비들이 자주 애를 먹였어. 아버지와 큰 삼촌은 청솔 더미 아래 땅굴을 팠어. 뚫어놓은 방공호로 대피 연습을 자주 하더라고. 방공호는 골목을 가로질러 논으로 연결해 두었어. 그러한 집이 더러 있었지. 친구 김상연의 뒷밭에도 방공호를 파놓았다고 하더라고."
"죽은 삼촌 외에는 피해가 없었는지요?"
"왜 없었어. 우리 집에도 공비 세 명이 들이닥쳤어."
"쌀독 있는 곳을 대라. 작은 엄마에게 쌀자루를 벌리라 하더군. 쌀 두 자루와 간장, 된장을 퍼 담고는 바로 집에 불을 질렀어. 치솟는 불길을 잡을 수 없었어. 마을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으니. 덜덜 떨면서도 호기심에 논 마당에 가봤어. 논 마당에는 허연 시체들이 즐비하더군."
#37. 사망자 황목용 43세. 조카 황재환 13세
아버지의 회갑 준비
시집오기 전 일이에요. 시아버지에게 들은 얘깁니다. 큰아버지는 시할아버지 회갑잔치를 열고자 하양장에 장을 보러 갔어요. 준비물을 소달구지에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시집은 살림살이가 넉넉하여 잔치를 질펀하게 벌이려고 했대요. 집으로 오는 도중, 질구디에서 친구들과 어울러 술을 마시다 공비에게 잡혔어요. 밧줄로 묶인 채 부욱으로 끌려가 총에 맞아 죽었어요. 술집에 들르지 않고 집으로 바로 가셨다면 살았을 것인데.
"황씨 집안에서는 새로운 가풍이 생겼다는데 무엇이죠?"
"회갑 장을 보러 간 아들이 처참하게 죽었으니 슬픔이 오죽했겠어요? 시할배는 자기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며 엄명을 내렸어요."
"나의 생전에는 회갑잔치라는 말 자체를 꺼내지 마라. 집안의 누구 할 것 없이."
"가문에 새로운 법이 만들어졌군요?"
"네, 회갑이란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못했어요."
"제사도 초저녁에 지낸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세월이 어지러웠잖아요? 저녁이면 집에 불을 밝히지 말라고 했어요. 공비들의 표적이 된다고. 우리는 저녁 식사 겸 초저녁에 제사를 모셔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황원도가 살았던 곳은 가마골이다. 무학산 기슭에 자리한 그곳에는 네 가구가 살았다. 가마골은 유년 시절, 추억의 창고이다. 책 보자기를 허리에 두르고 솔방울을 따러 그 골짜기에 자주 다녔다. 흰 눈이 소복이 내리는 날이면 토끼를 사냥코자 가마골에 올라간다. 인적에 놀란 토끼는 두 귀를 쫑긋 세운다. 인해전술의 그물망에 걸려든 놈의 놀란 눈망울이 불쌍했다.
조카 황금호의 진술이다.
"놈들은 한칠만 씨 집 뒤에 청년들을 일렬종대로 세워놓고, 총의 위력을 시험해보자며 총을 갈겼대. 몇 사람까지 관통했는지 모르지만. 총을 쏘고 난 다음 차례로 칼바람을 냈다 하더라고. 당숙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아버지는 백부와 함께 돌아가신 당숙을 업고 왔어."
#38. 사망자 황원도 45세. 증언, 조카며느리 김옥순, 박윤순. 하양읍
오촌 조카 황금호. 박사리
중상을 입고 유일하게 살아 있는 두 사람의 핏빛 목소리를 들었다. 남편과 아버지, 아들을 잃고 어려운 삶을 헤쳐온 38명 유족의 절규를 들었다. 수십여 명의 부상자 가족과 이웃의 아픈 이야기도 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쓰려면 몇 권의 책도 부족하다. 그들의 힘들었던 여정을 오롯이 담아내지 못해 죄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역사의 현장을 찾는다. 공비들이 주둔한 '양시골짜기'에 올랐다. 언제 아픈 역사가 있었느냐는 듯 산천은 의구하다. 지난날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양시골은 숱한 공비의 유골을 품었으리라. 지리산 뱀사골이 수많은 빨치산을 품은 것처럼. 지리산 중산리에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을 세웠듯, 양시골에도 버금가는 상징물을 만들면 좋겠다. 갓바위가 내려다보는 '양시골'과 '박사리반공희생자추모공원'을 애국의 현장으로 삼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웠으면 좋겠다.
반공희생자위령비 주위를 둘러보며 그날을 회억(回憶)한다. 위령비에 새겨진 38명의 이름을 쓰다듬는다. 이슬처럼 스러져간 한분 한분의 이름을 뇌어본다. 가슴이 먹먹하다. 영령들은 비록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했지만, 나라와 마을의 안녕을 빌고 계시리라.
하루빨리 조국의 허리가 이어지길 염원하며!
박기옥
1949년 경산 와촌 출생. 모리코트상사 대표. 현 경산문인협회 회장. 수필집 '고쳐 지은 제비집' '소금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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