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촛돌이'라 불리고 싶은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은 레닌과 볼셰비키가 기획하고 지도한 것이 아니었다. 소련 공산당 공식역사는 '기획'과 '지도'라고 기술하지만, 유고슬라비아의 개혁 공산주의자 밀로반 질라스의 말대로 "그런 척" 하는 것에 불과하다. 혁명에서 볼셰비키가 한 역할은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 한나 아렌트 식으로 말하자면 거리에 나앉은 권력을 주웠을 뿐이다.

혁명의 에너지는 전적으로 대중의 '자발적' 봉기에서 나왔다. 노동자들의 '공장 소비에트' 결성과 운영에서 볼셰비키의 '지도'는 씨도 안 먹혔다. 농촌도 다르지 않았다. 소작농들은 '당의 명령'으로 지주를 몰아낸 게 아니었다. 자발적 '정의의 실현'이었다. 이들은 볼셰비키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레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판을 흔드는 것뿐이었다. 레닌은 혁명에 대한 대중의 자발성이 조기에 시들 가능성에 조바심이 나있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레닌은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임시정부가 성공해 정세가 안정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이 전술은 성공했고 볼셰비키는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 봉기의 열매를 슬쩍 따먹은 것일 뿐이다.

'최순실 정국'의 수습 방안을 놓고 야당이 거듭해온 표변(豹變)은 이를 빼닮았다. '최순실 국정 농단'이 드러난 이후 제안된 모든 수습 방안을 걷어차기만 했다. 거국중립내각, 국회 추천 총리, '질서 있는 퇴진' 모두 그랬다. 먼저 제안해놓고 대통령이 받으면 거부했다. 그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거국중립내각, 국회 추천 총리, 질서 있는 퇴진은 모두 '최순실 정국'의 안정적 관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야당은 그것이 싫다는 거다.

'김병준 총리'를 거부한 것이나, 탄핵 이후를 관리할 총리를 뽑지 않기로 '합의'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 총리 내정자나 국회 추천 총리가 잘해서 정국이 연착륙하면 큰일이다. 그렇게 되면 야당의 존재감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그들이 새로운 '대권 스타'로 뜰 수도 있다. 야당 특히 이미 대통령이 된 것처럼 여유만만인 유력 대권주자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할 사태다.

이런 속셈은 '묻지 마 탄핵'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1야당 원내대표는 "가결 여부를 고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야 3당 합의로 탄핵안을 발의하는 순간 돌아갈 다리를 불사른 것"이라고 했다. 자못 비장(悲壯)하지만, 가결의 키를 쥐고 있는 새누리당 비주류가 촛불에 타죽지 않으려면 찬성할 수밖에 없을 것임을 계산한 연출이다. 탄핵이 가결되면 황교안 총리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된다. '탄핵 이후'를 관리할 총리를 뽑아놓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야당은 황 대행 체제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혼란의 지속은 불문가지다.

부결도 나쁘지 않다. 비판이 쏟아지겠지만 새누리당을 덮칠 재앙과 비할 바 못 된다. 부결 즉시 새누리당은 공중분해 될 것이다. 대권판은 야당의 독무대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촛불은 더욱 무서운 기세로 타오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결은 야권에 또 다른 기회다. 부결돼도 박 대통령이 '식물 대통령'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에 따라 대통령은 있어도 없으나 마찬가지인 무정부적 혼란은 더 격심해질 것이고, 촛불을 등에 업고 야당이 설칠 공간 또한 더욱 넓어질 것이다. '묻지 마 탄핵'은 이래저래 야당엔 '꽃놀이패'다.

이미 권력은 박 대통령의 손에서 떠났다. 중도 하차도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다음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과도기를 관리할 '파산 관재인'도 없다. 권력은 거리에 나앉아 있는 것이다. 야당은 '촛불'에 기대어 힘 안 들이고 그것을 주우려고만 한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국민은 그 권력을 뭐라고 부를까. 오직 촛불이 만들어줬다는 뜻으로 '촛돌이'라고 할지 모른다. 훌륭한 전례가 있다. 2004년 총선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덕에 국회에 입성한 108명의 초선 의원들을 '탄돌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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