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사만어 世事萬語] 박근혜 VS 박근혜

'한 지도자가 이끌고 있는 나라의 모습, 그 현주소는 바로 그 지도자의 마음을 펼쳐놓은 것일 뿐이다.' '임금 마음에 망조가 들면 제일 먼저 교만해진다. 그리되면 자연히 충신, 간신의 말을 구별 못 한다. 간신의 말만 듣는 임금은 머지않아 자신과 나라를 망치고 만다.'

누가 한 말일까? 놀랍게도 이 말, 아니 이 글을 쓴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인 1990년대 박 대통령의 직업은 수필가였다. 그는 1993년 '한국수필' 신인문학상을 받고 등단했으며 '내 마음의 여정'(1995),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 삼아'(1998) 등의 에세이집과 일기 모음집 등을 출간했다. 위 글은 이들 책 내용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청와대 관저에서 박 대통령이 꺼내 들었어야 할 필독서는 40대 시절 그 자신이 쓴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글 쓸 당시의 마음가짐을 정치계 입문 이후에도 지켰다면 비선 실세가 국정을 농단하는 일도, 국민들이 촛불 들고 거리로 나서는 일도, 그가 "피눈물 난다"는 수모를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한때 신뢰와 원칙의 정치인으로 불렸지만 포장된 이미지였음이 드러났다. 그의 단답형 말투와 미소가 만들어내는 '신비주의'에 많은 이들이 속아 넘어갔다. 하지만 대국민담화에서의 거듭된 약속 파기와 말 바꾸기로 이제 그에게는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는 지난달 29일 3차 대국민담화에서 "대통령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개헌을 통해 국회가 대통령 임기를 단축시켜주면 명예롭게 물러나겠다는 복심이었겠지만 국민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주권자인 국민 뜻을 받아들여 국회는 법적 절차에 따라 탄핵을 의결했고, 거기에 날치기나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그런데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리겠다며 다시 한 번 약속을 깼다.

이 시점에서 박 대통령에게 읽어주고픈 글이 있다. 역시 20여 년 전 그가 쓴 수필집 '내 마음의 여정'에 나오는 글이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부러워하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필요는커녕 오히려 사회에 해를 끼치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어 제발 좀 물러나 주었으면 좋겠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다.'

항간에 "박근혜의 말은 박근혜로 반박할 수 있다"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데 그저 우스갯소리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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