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요 '동동'은 오레지나 대구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가 '달구벌 동동'이라는 한국창작무용 작품으로 다룬 소재다. 오 교수의 작품은 갓바위, 비슬산, 측백나무 등 대구, 즉 달구벌의 자연을 품고 어루만졌다. 그러면서 자연의 역동성을 찬미했다.
최근 의상 제작으로 이 공연에 참여하며 얻은 여운에서 채 빠져나오기 전인 11월 말일 새벽 2시 대구를 대표하는 서문시장에서 큰불이 났다. 이후 일이 좀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공연에서 반복하던 '달구벌 동동, 달구벌이여 동동하자'를 되뇌며 기도하고 있을 뿐이다.
불이 완전히 잡힌 이틀 뒤 점심때 가서 본 서문시장은 영화에나 나올 듯한 폐허 그 자체였다. 40년 전의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처럼 서문시장 4지구에서 발생한 화재였다. 그때도 서문시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상인들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절규했다. 나는 화재 발생 현장과 조금 떨어져 있는 아버지의 점포에서 불길을 안타깝게 지켜봤다.
불은 피했지만 그 여파는 선친의 가게까지 덮쳤다. 화재 이후 정부는 낙후한 전통시장을 개선하기 위해 종합상가를 세우는 정책을 내놨고, 선친은 무너졌다. 평생의 꿈으로 올린 3층짜리 상가 건물이 곧장 허물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건물을 부수는 굴착기 앞에 선친은 드러눕기까지 했다. 그러다 선친은 마음의 병을 얻었고 결국 병환을 이기지 못해 가게 문을 닫고 말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는 유독 내게 맞춤복을 즐겨 입혀주셨다. 이번에 불이 난 서문시장 4지구에서 원단을 구입해 평소에는 같은 시장 안에 있는 양장점에서, 명절이면 대구 중구 포정동의 의상실에 가서 일본 패션잡지를 참고해 내 마음대로 의상을 디자인하고는 했었다.
그때가 계기가 돼 지금 내가 옷 만드는 일을 하고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학교 전교생 중 내가 제일 예쁜 줄 알았다. 사실 인기도 많았다. 다만 그게 내 외모가 아니라 '옷빨' 덕분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고서였다. 일률적으로 교복을 입고 단발머리를 하게 됐으니 말이다. 사춘기였던 나는 잠시 혼돈 아닌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내 어린 시절의 풍경들을 죄다 빼앗아 간 게 바로 서문시장 화재다. 40여 년 전의 불이 그랬고 이번의 불이 또 한 번 그랬다. 문득 최근 제작에 참여한 무용 작품 '달구벌 동동'이 떠올랐다.
'동동'의 메시지가 서문시장도 품고 어루만져줬으면, 그리고 서문시장의 역동성을 되살려줬으면. 그런데 이건 공연에서처럼 말로만 반복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당장 실천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래야만 서문시장은 반세기 전에도 그랬듯이 반세기 후에도 대구를 대표하는 큰 시장으로 우뚝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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