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악의 고리, 정경 유착

"정부 요청을 기업이 거부하기 힘든 건 한국적인 현실!"

맞는 말이지만, 울화통이 터진다. 이달 6일,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9대 그룹 총수들을 한꺼번에 TV를 통해 봤다. 28년 전, 일해재단 청문회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GS그룹 회장인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과 구본무 LG 회장은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774억원)과 관련해 "기업은 정부 정책과 요청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은 국조 위원들의 곤란한 질문을 반복 동문서답 화법(삼성이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송구하지만 기억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등)으로 피해가며, 대가성을 묻는 질문에는 "대가를 바라고 출연한 적 없다"고 했다. 이날 9대 그룹 총수 모두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고 다짐했다. 몇몇 대기업은 전경련 탈퇴를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켜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이 나라에 대기업이 없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대만처럼 오히려 국민 경제행복지수가 높아지지 않았을까. 지난 50년 동안 대한민국 대기업은 온갖 특혜와 비리의 온상이었다. 산업화 시기에 '한강의 기적'을 이룬 주역이었던 삼성'현대 등 굴지의 대기업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기업 경쟁력을 키운 것이 아니라 정권과 은밀한 거래를 주고받으면서 덩치를 키웠다.

1997년 IMF 외환 위기와 2008년 국제 금융 위기 때도 국민은 세금도 모자라 집안에 아껴둔 금까지 내놓으면서, 나라 경제를 위해 희생했다. 하지만 일부 대기업들은 부실 경영의 책임을 피했으며, 국민의 고혈인 '공적자금'으로 다시 일어섰다. 이 속에서 정권에 밉보인 대기업(대우, 한보, 우방, 보성 등)들은 속절없이 부도를 내고 사라졌다.

현 재벌의 행태는 대한민국 양극화의 주범이다. 빵집, 떡볶이까지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큰 공사를 수주한 후 하청기업에 떠넘기는 식으로 부를 축적했다. 지방에 공장을 지을 때도 각종 혜택(헐값 부지, 세금 감면 등)을 받고, 갑(甲)질을 한다. 자원봉사도 기업 이미지 홍보에 도움이 되는 보여주기에 그치고, 전통시장 활성화 등 서민경제에 기여하는 정부 정책에도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조금 과하게 표현하면, 수십 년 동안 국가와 국민의 고혈을 빨아 대기업 배만 불린 셈이다. 정경 유착이란 악의 고리가 재벌에게 탄탄대로를 열어줬다. 정부와 대기업의 이 '달콤한 고리'는 고래 힘줄처럼 질기고, 놓기 힘든 유혹의 거래다. 대기업은 정부의 각종 사업에 출연하고, 정치권에 비자금을 대면서 뒤로는 수십 배 이상의 이권을 챙겨왔다. 삼성은 미르'K스포츠재단에 수십억원을 출연하고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말(승마용)을 사주면서, 국민연금 협조를 얻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에서 수천억원의 혜택을 봤다.

대기업에 대한 법인세 혜택도 큰 문제다. 최근 7년간 대기업들의 사내 유보금이 가파르게 증가했는데 이는 법인세 인하의 효과로 보인다는 진단이 나왔다. 실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소득세는 42조원에서 62조원까지 증가했으나, 법인세는 44조9천억원에서 45조원으로 거의 늘지 않았다. 더 나쁜 것은 대기업의 사내 유보금 증가는 상장회사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고, 고용 확충 효과는 낮고 비정규직 증가율이 더 높아졌다.

정경 유착의 가장 큰 수혜자는 대기업, 작은 수혜자는 권력자 및 정치권인 반면 막대한 피해자는 국민들, 그중에서도 서민이다. 월급쟁이·자영업자들의 월급이나 수입에서 매월 빠져나가는 국민연금이 삼성의 배를 불려주는 데 사용된다면, 분노할 일이 아닌가. 말이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는 대기업이지 천민자본주의에 함몰된 시정잡배와 무엇이 다른가.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를 병들게 하는 정부(정치권)와 대기업의 정경 유착. 이 악의 고리를 끝내 끊지 못한다면, 아예 대기업을 해체하는 것이 서민 경제에는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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