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고통도 밑천이 된다

바야흐로 '신춘', 즉 신춘문예(新春文藝)의 때다. 응모해본 적이 없어서 감각이라곤 전혀 없었는데, 심사위원 몇 번 만에 저절로 그때가 각인되었다. 등단이 된다 해도, 그것으로는 밥 벌어먹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형편을 생각하면, 더불어 마음도 부대껴온다.

나는 오랜 시간 전업주부였다. 안 하면 대번에 표시가 나지만 정작 해놓고 나면 생색낼 게 없는 일들에 치여 사는 명분 없는 노동자 말이다. 일? 그게 과연 일축에 들기나 하는 걸까? 일이라면 보상이 따라야 하는데, 무슨 보상? 손에 잡히지도 않는 노동환산급여? 가족의 안온과 평안이라는 뜬구름? 청소, 빨래, 설거지, 분리수거에 인생 걸려고 그 여러 날을 도서관에서 종종거렸던 건 아니었다. 손에 익는다는 것 말고는 삶의 진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런 사소함을 위해, 그 숱한 시간을 전전긍긍했던 것 또한 아니었다. 물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한데 그게 왜 하필 나여야만 하지?

서러웠고, 억울했다. 그 상태로 나는 책에 빠져들었다. 원래 책이 좋기는 했으나 더욱 더 지독하게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그저 나 스스로를 수수방관하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날이 갈수록 주섬주섬 모은 문장들이 내 일상에 적용되어갔다.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구절들이 내 살이 되어간 것이다. 정신에 신명이 들면서, 나는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를 중심에 두고 책들로 하여금 내 주위를 공전하게 하고, 거기서 떨어진 유성 같은 문장들을 글로 옮겨 적어나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설이었다.

내가 서른여덟 살에 문학동네 소설상으로 등단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아줌마의 성공신화'로 치켜세워 주었다. 하지만 나는 퍽 담담했다. 운이 기가 막히게 좋았던 것이지, 결코 내가 신화의 주인공이나 성공의 주역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 때문이었다. 뇌가 쪼그라드는 고통을 거스르고, 내가 바닥으로 떨어져 간다는 절망을 거스르고, 별다르게 할 것이 없는 현실을 거슬렀을 뿐인데, 명확한 결과지를 받아들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정도의 자각이랄까.

고통도 밑천이 된다. 그렇다고 고통을 운명으로 여기고, 고통이 주는 통증에 대해 체념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 고통이라는 것이 어쩌다 생겼는지, 얼마만큼의 부피를 가졌는지,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 똑바로 들여다봐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면역이 생기고 버틸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진다. 하니 신춘이든 문학상이든, 쓰고 싶으면 쓰면 되는 거겠다. 그럼에도 행운을 빌지는 못하겠다. 솔직히 '문학'이 축복받을 만한 영역은 아니니까 말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