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음악 거장들의 숨겨진 생활사…『베토벤의 이중계약』

베토벤의 이중계약/ 니시하라 미노루 지음/ 이연숙 옮김/ 열대림 펴냄

클래식, 그러니까 세계 수많은 고전 음악 중에서도 유럽 고전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책은 그 음악을 발전시킨 거장들의 실은 처절했던 생활사를 알려주는 책이다. 책 제목에 들어간 베토벤 말고도 모차르트, 바흐, 쇼팽 등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음악가들이 무대가 없어 떠돌고, 자존심을 버린 채 길거리의 연주자가 되기도 하고, 연주회를 열기 위해 권세가와 부자의 비위도 맞추며 살았다.

그러고 보면 그때와 지금 음악계는 참 닮았다. 무료 초대권은 그때도 애용됐고 지금도 애용되고 있다. 관객을 모으는 일은 요즘은 물론 과거에도 힘든 일이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1천 객석의 극장에서 공연을 열 때 보통 200여 장의 초대권을 뿌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19세기 중반 영국 런던에서는 500장의 초대권이 뿌려져 이건 너무 했다 싶었는지 관련 기사가 신문에 나기도 했다. 초대권이 근절되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극장이 초대권을 탈세의 도구로 썼기 때문이다. 연주회를 열면 수익의 일정액을 세금으로 냈는데, 초대권 분량만큼 공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초대권을 원활하게 처분해 주는 업자도 생겨났다. 1828년 프랑스 파리 경찰의 보고서에 따르면 통상 공연 관객의 3분의 2가 제값을 지불하고 입장한 관객이 아니었다.

요즘은 스타 음악가만 할 수 있는 투어 공연을 과거 유럽의 음악가들은 생계를 위해 무조건 '뛰어야' 했다. 여성 팬이 유독 많았던 리스트(1811~1886)같이 일부 스타 음악가는 각지로부터 초청을 받아 안정된 순회공연을 했지만,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마치 장돌뱅이처럼 일거리를 찾아 유럽을 떠돌았다. 요즘이야 비행기 타고 차를 타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지만, 당시 여행은 마차를 타고 며칠씩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며 강도를 당할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신동으로 불린 모차르트(1756~1791)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고된 연주 여행을 감내해야 했다. 그나마 이름이 좀 있는 음악가들에게는 안정적인 일거리가 있었다. 그런 명성도 없는 음악가들은 유랑 악사 생활을 해야 했는데, 보헤미아(체코 서부) 출신 음악가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18, 19세기 오스트리아와 독일 음악사는 보헤미아 음악가들 없이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거리의 악사=보헤미안'의 이미지는 이즈음부터 만들어진 게 아닐까.

당시 음악가들의 수입은 어땠을까. 먹고살기 힘든 시절 궁정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궁정악단 일자리는 음악가가 얻을 수 있는 제일 안정된 일자리였다. 그럼에도 수입 자체는 높지 않았다. 독일 본 궁정악단의 테너 가수였던 요한 베토벤(우리가 잘 아는 그 베토벤의 아버지)의 연 수입은 44세 28년 근속에 315플로린으로 당시 사회의 중하 수준이었다. 그런데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사회가 급속도로 변하며 궁정과 교회의 연주자 일자리가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다. 결국 음악가들은 음악 소비가 많은 대도시로 몰렸다. 극장, 댄스홀, 유랑 세레나데 연주 악단에 들어갔다. 하이든(1732~1809)도 17~18세 때 유랑 세레나데 연주 악단에 들어가 거리의 악사 생활을 했다. 악보 출판과 악기 교습 같은 부업도 당연히 가져야 했다. 음악가들은 또 상조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수익 일부를 모아 서로의 생계를 살펴주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에 끼지 못한 수많은 음악가들은 도시의 밑바닥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계의 문제는 책 제목과도 연관 있다. 베토벤(1770~1827)이 유럽 음악 그 자체를 상징하는 거장이 돼 있던 시기, 베토벤은 오펠스도르프 백작으로부터 선금을 받고 교향곡 제4번과 제5번을 작곡했다. 제4번은 그대로 백작에게 헌정했지만, 제5번은 '경제적 곤궁'을 이유로 다른 두 명의 귀족에게 또 돈을 받고 헌정했다. 이중계약이었다. 하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귀족들은 당시 거장인 베토벤에게 관대했고, 이중계약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베토벤은 다른 음악가보다 사정이 나은데도 욕심을 부렸나 보다. 1800년대 초반 오스트리아 빈에 머무는 조건으로 당시 고급 관료와 비슷한 거액의 연금을 받기도 했으면서. 음악이 위대하다고 음악가의 도덕성까지 대단한 것은 아니다. 요즘 음악계의 일부 음악가들도 그렇지 않은가.

그때보다 좀 나아진 것은 음악가보다는 관객이 아닐까 싶다. 당시 관객은 음악은 아예 안 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공연장에서 시끄럽게 떠들었다. 산업혁명 이후 시민계층이 자산을 축적하면서 연주회는 더는 왕족과 귀족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게 됐다. 연주회는 음악 감상보다는 사교를 위한 공간으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벼락부자의 상징인 손잡이 달린 안경과 지팡이에 중산모자를 쓰고 연주회를 찾았다. 당시 연주회에 대해 작가 장 파울은 1806년 '일반 음악 신문'에 '음악을 반주 삼아 가족과 수다를 떠는 곳'이라고 썼다. 관객들의 수다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어떤 연주회에서는 개인적인 대화를 감시하는 인력을 배치하기도 했다.

280쪽, 1만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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