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 친구야, 이래도 술 한 잔 안 할끼가

시각·후각·미각 자극…술 한잔 하자는 멋진 초대장

백거이
백거이

친구야, 이래도 술 한 잔 안 할끼가

백거이

푸른 거품 부글부글 새로 담은 술 綠蟻新醅酒(녹의신배주)

붉은 질화로에 새빨갛게 타는 숯불 紅泥小火爐(홍니소화로)

저물녘 눈이 펑펑 쏟아질 듯, 쏟아질 듯 晩來天欲雪(만래천욕설)

친구야, 이래도 술 한잔 안 할끼가 能飮一杯無(능음일배무)

*원제: 問劉十九(문유십구). '劉十九'는 대가족 제도하에서 유씨 집안의 형제들 가운데 그 서열이 열아홉 번째에 해당되는 사람. 당나라의 저명한 시인으로 작자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절친한 친구였던 유우석(劉禹錫)을 가리킴. *綠蟻: 술이 익을 때 푸른빛을 띠며 부글부글 이는 거품.

바야흐로 지금 새로 담근 술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서 푸른 거품이 부글부글 떠오르고 있고, 붉은 질화로에는 새빨간 숯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푸른 술과 붉은 질화로, 그 붉은 질화로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새빨간 숯불의 시각적 이미지가 단연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런데 보다시피 1구와 2구는 모두 서술어가 없는 명사형으로 끝나고 있어서, 1구와 2구의 상호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새빨간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 화로 위에 거품이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푸른 술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는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터다. 따라서 이 대목은 단순히 시각을 자극하는 장면일 뿐만 아니라, 방안에 진동하는 술 냄새로 후각을 자극하고 미각을 자극하기도 하는 것.

그러지 않아도 따뜻한 화로를 끼고 앉아서 맛있는 술을 막무가내로 퍼마시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에 울컥 치솟아 오르는데, 저물어가는 하늘에서는 금방이라도 눈이, 그것도 이왕이면 함박눈이 펑펑 쏟아질 기세다. 그러니까 술 마실 수 있는 분위기, 아니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분위기가 완벽하게 조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술도 마음 맞는 친구와 이마를 마주 대고, 주거니 받거니 함께 마셔야 훨씬 더 멋이 있고 맛이 있는 법. 아무리 맛 좋은 술이 있고 술 마실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해도 혼자서야 도대체 무슨 청승으로 술을 퍼마시고 있겠는가. 그러므로 작자는 이 짤막하고도 인정이 물씬 풍기는 시를 일필휘지로 지은 뒤에 이웃에 살고 있는 다정한 친구에게 보내어 묻는다. 여보게 친구, 분위기가 여차여차한데 아무래도 한 잔 안 할 수가 없잖은가. 대답해 보게. 안 그런가 친구!

술이 등장하고 있기는 해도 어렸을 때 본 성탄절 카드 속에 등장하는 포근한 그림처럼 정겨운 시다. 오늘은 올해의 맨 마지막 날! 이토록 멋진 초대장을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한 해가 와장창 저무나 보네. 이토록 멋진 초대장을 단 한 번도 보내보지 못한 채, '어 어 어' 하며 우왕좌왕 허둥대는 사이에 올해도 기어이 내 손을 확 탈치고 가, 가나 보네. 새해에는 주위에 인정도 좀 내면서 살아봐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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