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텃밭·무료·급식소·비·구둔역, 일상서 건져낸 추억과 그리움…『기다림은 언제나 이르다』

기다림은 언제나 이르다/글'사진 혜윰/책이 있는 마을 펴냄

창작집단 '혜윰' 2기 회원 9명이 각자의 주제에 따라 여러 편의 글을 쓰고, 이를 묶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특별한 규칙을 정하지 않고 각자 자유롭게 글을 썼다. 그래서 운문도 있고, 산문도 있다. 여행지의 사색도 있고,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을 쓴 글, 고향집과 아버지에 대한 추억, 내일의 기대에 대한 글도 있다. 떠나버린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먹먹함을 담은 글도 있다.

책에 작가들에 대한 정보는 없다. 어떤 의도로, 어떤 모임을 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오직 글이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몇 장의 사진이 있을 뿐이다.

손승휘 씨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텃밭'에서 '텃밭을 가지겠다/ 한 열 평이면 되겠다/ 두 평에는 고추를 심겠다/ 두 평에는 상추를 심겠다/ 두 평에는 부추를 심겠다/ 두 평에는 깻잎을 심겠다/ 두 평에는 옥수수를 심겠다/ 아내가 여보 하고 큰소리로 외치면/ 텃밭에 나가 상추와 고추를 따서 돌아서겠다/ 늠름하게 아내를 향해 걸어가고/ 거들먹대며 밥상머리에 앉겠다/ 내가 딴 고추와 상추를 먹으면서/ 옥수수 속을 궁금해하겠다/ 언젠가는 꼭'이라고 썼다.

상추를 두 평이나 심겠다는 데서 작가가 텃밭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참말로('정말로'가 아니라) 아름답고 매력적인 작품이다. 기성작가의 글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생동감이 넘친다.

변혜연 씨는 '무료 급식소'라는 작품에서 '일 년 내내/ 뜨거운 눈이 내린다/ 쇳소리 식판 위, 눈이 쌓인다/ 밥값

200원/ 물은 셀프라예라는 팻말이 걸쳐 있는 입구 문턱/ 남루한 발걸음들/ 반짝/ 눈물을 찍으며/ 힘껏 무릎을 들어 올렸을 것이다/ 밤새 장독대 위 소복이 쌓인 흰 눈 마냥/ 뜨거운 국 옆으로 쌓이는 흰 눈/ 더…더… 외마디 말뿐/ 흰 산을 받아든 저 이웃의 어깨 너머/ 쨍/ 입맞춤의 하루'라고 썼다.

권선옥 씨의 작품 '비를 맞자'는 생생해 어깨 위로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듯하다.

'비 내린다/ 우산 없는 자/ 비를 맞자/ 우산 가진 자는/ 용기 내야 맞을 수 있는 비/ (중략)/ 늠름한 나무처럼/ 촉촉이 흐르는 침묵을 받아들여라/ 우산 가진 자/ 비를 잊고/ 우산 없는 자/ 비를 맞자'

김문하 씨는 '구둔역에서'라는 작품에서 '오래 서로 마주했지 고마운 언덕 큰 나무 가지 사이로 아직 들려오지 않는 구둔역 철길 소리 끝과 시작이 손을 잡는 고요한 초하루 한나절 귀 열면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했던 이름 모를 꽃들 말이 마냥 들릴 것도 같아 구둔역 새털 같은 구름을 모으면 먼저 와 어김없이 계절 스며들어 일어서는 여린 슬픔의 햇살은 멀고 노을 빗질하는 키 높은 풀들 사이로 굽이돌아 오고 있는 바람 소리 들린다 늦지 않게 오라 저렇게 손을 흔드는 구둔역 버드나무 잎 아래서 기다림은 언제나 이르다 기적(汽笛) 소리 어디쯤 오고 있는지'라고 썼다.

책은 정재숙 씨의 '고통을 대면하는 방법', 김문하 씨의 '구둔역에서', 박광진 씨의 '내게로 오려무나', 손승휘 씨의 '골목을 위로하는 바람이 되어', 권선옥 씨의 '말의 유희', 변혜연 씨의 '바다는 잠들지 않는다', 이미경 씨의 '헤밍웨이, 세르반테스… 그리고 집시', 이승은 씨의 '피지컬 섹스'(physical sex), 정화령 씨의 '항암제'를 차례로 싣고 있다. 237쪽, 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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