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교황은 정말 고려 충숙왕에게 서신을 보냈을까

안재원 교수, 세계종교평화협의회 주장 반박 논문 발표

"Magnifico viro Socho de Chigiota Regi Corum"

라틴어로 된 이 문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와 서구 가톨릭간 교류의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

이 문구는 교황 요한 22세가 1333년 고려 충숙왕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신의 머리말이다.

지난 6월 말 바티칸기록원에서 두장짜리 이 서신의 사본을 입수한 세계종교평화협의회는 최근 내용을 번역한 결과 교황청에서 우리나라에 보낸 최초의 서신이라고 밝혔다.'

문제의 문구 중 "Regi Corum"을 "고려인들의 국왕"이라고 해석했다.

이 서신의 수신자가 고려 충숙왕이라면 우리나라와 가톨릭간 교류사를 다시 써야 한다.

지금까지는 1593년 임진왜란 때 스페인 출신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한반도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자 신부였다.

게다가 이 서신에는 "오래전부터 믿었던 사람들이든 새로이 받게 된 사람들이든, 그들이 당신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의 신앙에 머물 수 있도록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줬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내용도 나온다.

일반 백성들도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는 뜻이다. 원나라에서 생활했던 왕족 일부가 기독교 신자인 것만 알려졌을 뿐 기독교가 고려 백성들에게까지 전파됐다는 기록은 현째까지 없었다.

하지만 세계종교평화협의회의 발표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는 최근 학술지 '교회사학'에 투고한 '교황 요한 22세가 보낸 편지에 나오는 Regi Corum은 고려의 충숙왕인가?'라는 논문에서 편지의 수신인이 고려의 충숙왕이 아님을 밝혔다.

서양 고전학을 전공한 안 교수는 일단 라틴어 문법 체계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고려인들의 왕'을 뜻하는 'Regi Corum'에서 'Corum'은 복수 소유격인데, 이런 형태가 나올 수 있는 주격은 'Ci', 'Cores', 'Cori'다.

이중 'Cores', 'Cori가 일반적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Corea'와 음성학적으로 비슷하다.

하자민 안 교수는 1250년대 가톨릭 신부의 선교 여행을 기록한 '여행기'에서 고려를 가리키는 말로 'Caule'(카울레)가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고려의 중국어 발음 '가올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1300년께 쓰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도 고려는 '카울리'라는 이름으로 소개된다.

즉, 그 당시 유럽에서는 고려를 'Corea'가 아닌 'Caule'라고 지칭해 'Corum'을 '고려인들의'이라고 옮기기 어렵다는 뜻이다.

역사적인 맥락에서도 이 서신을 고려의 충숙왕에게 보낸 서신으로 보기 어렵다고 안 교수는 판단한다.

교황 요한 22세는 캄발리크(현재 중국 베이징)의 대주교가 사망하자 니콜라우스 신부를 후임자로 임명하고 그에게 이 서신을 들려 부임지로 보낸다.

교황은 이 서신에서 수신자에게 니콜라우스가 새 대주교로 임명됐음을 알리고 그를 환대해 달라고 당부한다. 서신이 "여행의 안전을 보장하는 통행증" 역할을 한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편지의 수신자가 당시 교황이 있었던 프랑스 아비뇽과 중국의 베이징 사이에 존재해야 한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고려는 베이징보다 더 동쪽에 있다. 니콜라우스가 자신의 부임지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고려까지 찾아갈 리 만무하다. 역사적으로 니콜라우스 신부는 베이징에 가는 도중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다.

안 교수는 이에 따라 "내적 증거이든 외적 증거이든 충족되지 않아 'Regi Corum'을 '고려인들의 왕'으로 읽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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