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는 유산(遊山)을 하련다-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우수상

삽화 이태형 화가
삽화 이태형 화가

나는 유산(遊山)을 하련다

윤흥식

나에겐 절친한 두 친구가 있다. 우리는 수시로 만나 함께 산을 찾는 사이다. 평시엔 가까운 논산의 노성산이나 청양의 칠갑산을 찾는다. 집에서 비교적 가깝고 오르고 내리는데 별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씩 배낭을 메고 먼 곳의 유명한 산을 찾아 등산을 한다. 그렇게 산을 찾은 게 벌써 십수 년이 넘었으니 우리나라 웬만한 유명한 산은 거의 다 섭렵한 것 같다.

재작년엔 우리의 명산인 지리산과 한라산 그리고 백두산을 찾았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찾아야지, 미루다 보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서두르자는 경찰관 출신 친구의 채근이 있어서였다. 물론 다른 친구들에게도 의사를 타진해보았지만, 시간이 없다거나 이미 여러 번 다녀온 곳이라며 거부를 해 셋이서만 찾았다.

5월에 1박 2일로 지리산을 찾았다. 중산리에서 하룻밤을 자고 순두류, 로터리대피소, 천왕봉, 제석봉, 장터목, 칼바위, 중산리에 이르는 12㎞ 거리를 8시간 30분 동안 걸었다. 물론 힘이 들었지만 천왕봉에 이르니 뿌듯함이야 어디에 비할 바 없었다. 다만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 오래 머물 수 없었던 것이 내내 아쉬울 뿐이었다.

6월에 찾은 한라산은 완도에서 배를 타고 가는 2박 3일 여행이었다. 첫날은 제주 시장을 구경하고 둘째 날 한라산 등반을 했다. 성판악에서 한라산에 오르니 안개가 사위를 가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어 안타까움이 컸다. 관음사로 내려오는 데 중간쯤에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라산을 정복했다는 뿌듯함이 모든 걸 덮어버렸다.

백두산은 두 친구 외에 셋이 더해져 나까지 여섯이서 3박 4일 일정으로 찾았다. 우리는 북파, 서파 모두 제대로 된 천지를 감상하는 행운을 얻었다. 3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힘든 천지가, 우리에겐 단번에 모습을 보여줬으니 모두가 덕인(德人)들인 것 같다는 농담을 하며 맘껏 웃는 여유도 가졌다.

두 친구 모두 30여 년 직장 생활을 영예롭게 마감하고 신 노년세대로서 유유자적 세월을 낚고 있다.

하여 오늘도 셋이서 산을 오른다. 이름하여 등산이다. 경찰관 친구가 앞서 오른다. 예전엔 별수 없었는데 술과 담배 끊더니 제법 산타는 데 이골이 난 친구다. 농협 친구는 산에 오르면 하품이 나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다반사더니, 근래엔 선두로 치고 나간다.

나는 어떤가? 나이가 들수록 두 친구를 따를 수 없다. 숨이 가쁘고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놈의 술에 곯고, 담배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낙오자 대열에서 허덕이고 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는 등산이 아니고 유산을 하련다고.

사실 경찰관 친구가 하는 것은 등산이다. 산을 오르면서 자연과 호흡을 함께해야 하는데 그냥 무작정 오르기만 하면 최고인 줄 알고 앞서가기만 한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 경쟁에서 지면 큰 벌이라도 받는지 무작정 오르기만 한다. 그래도 농협 친구는 뭘 아는 것 같다. 경찰관 친구의 앞섬을 제지하며 함께 할 것을 권하니까 말이다.

자, 이제부터 유산을 하자고 권하고 싶다. 가다가 힘들면 그냥 내려오면 되지 뭐, 그렇게 힘든 걸 죽어라 정상 정복에 목을 맬 필요가 있단 말인가? 가다가 꽃도 감상하고, 흐르는 계곡물에 목도 축이며, 솔바람에 흐르는 땀을 씻는 여유를 보이면서, 슬슬 가볍게 산을 오르는 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유산인 게다.

우리는 모두 대한노인회 회원이다. 사실 우리가 노인회 회원이란 걸 알게 된 것은 작년 가을에 소매물도를 여행할 때였다. 통영 여객터미널에서 배표를 끊을 때 매표원이 경로우대라며 할인을 해 주었기 그제야 우리도 노인이란 걸 실감했다.

예전 같으면 우리도 손자 손잡고 들에 나가 감농(監農)이나 할 나이다. 그런데 뭐 청춘이라고 그리들 난리를 피우는지 모르겠다. 물론 비지땀 흘리고, 가쁜 숨 몰아쉬며 산을 올라야 육체의 건강을 다지는 데는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육체의 건강보다 정신의 건강이 더 중하다는 걸 모르는 친구들이다. 나이에 맞게 육체를 써먹어야지, 무리를 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는 걸 잊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요즈음 TV에선 건강 관련 방송이 많다. 그중에서 우리 셋이 유념해야 할 내용이 있어 유산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나이 든 사람은 등산보다는 걷는 게 좋다고 했다. 나이 들어 무리하게 등산을 하다 보면 자칫 관절이 상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하여 평지를 걸을 것을 권한다. 요즈음 대부분 아파트 생활을 하는데, 계단을 오르는 운동은 괜찮으나, 내려올 땐 관절에 무리가 가니 반드시 엘리베이터를 타라고 했다. 다시 말해 체력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등산은, 하나를 얻으려다 둘을 잃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경고다.

나는 유산을 하련다. 앞서가는 친구들이 답답해하더라도 내 체력에 맞게 천천히 해찰하며 걷는 유산을 하련다. 노인회 회원이 되었으니 비울 때가 왔다고 본다. 모든 걸 비워야 한다. 특히 무얼 해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돈을 번다고 해 보자. 무얼 해 돈을 벌겠다는 건가? 청년실업률이 12%를 넘었다는데, 경로우대자가 어디를 기웃거리려 하는가? 가벼운 집안일이나 거들며 건강을 지키는 게 자식을 도와주는 일이란 걸 느껴야 할 때라고 본다.

친구들에게 권하겠다. 과신은 금물이란 걸 깨닫게 하겠다. 내 앞에서 체력 자랑하며 빨리 산에 오른다고 으스대지 말라고 충고를 하겠다. 너무 자신에 차 관절이라도 고장이 나면 그땐 나 혼자 산을 찾아야 하니, 제발 그런 불행이 없도록 하자고 설득하겠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디고 걸을 수 있는 길이 잘 정비돼 있다. 각 지자체마다 둘레길을 조성해 놓았다. 우리 고장도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이 많다. 친구들에게 산보다 평지를 걷자고 권하겠다. 오늘은 내 동네 걷고, 내일은 네 동네 걸으며, 모레는 차 타고 멀리 나가 다른 동네 걸어보고 그렇게 하자고 할 거다.

4대강 사업으로 자전거길이 아주 잘 정비돼 있다. 내가 사는 곳 논산도 금강을 따라 아래로는 군산까지, 위로는 신탄진까지 자전거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노인회 회원은 경기용 자전거가 필요 없다. 20만원짜리 생활자전거면 충분하다. 무리하지 않고 그저 힘닿는 데까지만 페달을 밟겠다.

나는 생명의 모체인 자연과 대화를 즐기련다. 자연에서 겸손을 배우련다. 위대한 자연 앞에 고개 숙일 줄 아는 겸손 말이다. 자연이 주는 흥취를 맛보며, 자연이 베푸는 자비를 느끼며, 한발 한발 다가가 품에 안기련다. 그건 등산이 아닌 유산을 해야 할 수 있는 자연 사랑 방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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