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연(82) 선생은 오늘도 바느질과 함께한다. 13세 때부터 바느질을 시작했으니 벌써 70년이 다 됐다.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져 화려하고도 단아한 자태를 풍기는 한복은 언제 봐도 아름답고 새롭다"고 했다. 김 선생은 2002년 최고의 기능과 장인정신을 갖춘 기능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명장' 칭호를 받았다. 대구경북에서는 제1호 한복 명장이다. 김 명장은 현재 '김복연한복연구원'(대구 중구 대봉동)을 운영하면서 오늘도 한복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한복 짓는 일이라면 자신 있어요"
김 명장은 1935년 경북 성주군 성주읍에서 태어났다. 집안일하는 사람을 여럿 둘 만큼 부자였다. 김 명장의 아버지는 "여자가 재주 많으면 박복하다"며 힘든 바느질을 못 하게 했다. 그러나 김 명장의 바느질 솜씨는 타고났다. 어릴 적 어머니와 침모(針母)의 어깨너머로 배운 바느질 솜씨로 16세 때 아버지 옷을 지었을 정도였다.
스무 살 되던 해 결혼하면서 대구로 나왔다. 아버지가 바느질을 못 하게 쌀집을 차려줬으나 남편이 다른 사업에 투자해 사기를 당했다. 스물세 살 때 대문 앞에 '삯바느질합니다'란 간판을 내걸고 한복을 시작했다. "아버지 말씀대로 바느질을 안 하려 했지만 먹고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김 명장의 바느질 솜씨는 금방 입소문이 났다. 서문시장에 세를 얻어 본격적으로 한복을 지었다. "두 사람이 앉으면 등이 붙을 정도로 좁았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돈도 벌었지요."
그러나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못 배운 것에 대한 한은 아닌데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성균관대와 단국대 전통복식과정에서 모자란 부분을 채웠습니다."
대한민국 명장 제도가 있다는 말을 듣고 도전했다. 딱히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한 번 만에 명장이 됐다. 대구경북 한복 분야에서는 최초의 명장이었다.
김 명장은 요즘도 바늘과 실을 놓지 않고 있다. "'명장'이라고, '내가 최고'라고 안주하는 순간 끝입니다. 끊임없이 보고, 배우고, 느껴야 합니다."
김 명장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며느리와 손녀가 함께한다. 처음에는 시어머니의 일이 너무 힘들게 보여 배우지 않겠다던 며느리가 30년 전부터 배우기 시작했고, 어릴 적부터 바느질 솜씨가 좋은 손녀도 적극적이다. 김 명장은 '여자가 솜씨가 좋으면 박복하다'며 바느질을 못 하게 했던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끔 생각난다고 했다. "살아계시면 정말 아버지 맘에 드는 옷을 지어 드릴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한복이란?
김 명장은 전통을 너무 벗어나면 고유의 우리 옷으로서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전통만 고집하다 보면 시대에 뒤떨어지기 쉬워요." 이러한 이유로 김 명장은 항상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한복 고유의 모습은 유지하되 현대적인 세련미와 패션 트렌드에도 부합하는 한복을 만들기 위해 고민한다.
김 명장은 "한복은 추녀의 곡선처럼 하늘을 향한 듯한 저고리 선과 아름다운 색채에서 우리 민족의 너그러운 마음씨와 인정미, 편안함,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한복을 입으면 마음 자세부터 달라진다고도 했다.
한복 입는 법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소매가 넓은 한복 팔 길이는 손목뼈에 오도록 입어야 하는데, 양장처럼 길게 입고, 치마 길이도 버선 등에 닿도록 입어야 하는데 신을 다 덮을 만큼 길게 입으니 한복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 명장은 한복은 체형에 맞는 '모양 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대부분 한복 디자이너는 가봉 없이 한 번에 완성하는데, 저는 체형에 따라 몇 번이고 가봉합니다. 그래야 입기 편하거든요."
김 명장은 13세 때부터 어깨너머로 바느질을 시작해 한복을 업으로 외길 인생을 살았다. "바느질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다시 태어나도 바느질을 할 겁니다."
◆3명의 스승
김 명장에게는 3명의 스승이 있다. 첫째는 어머니다. 아버지는 사업으로 늘 바빴고 잠시도 집에 머무는 날이 없었다. 특히 아버지는 성격이 까다로워 옷을 짓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어머니는 6남매의 옷도 읍내에서 알아줄 정도로 곱게 지어줬다.
김 명장은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바느질을 거들었다. 평소 온화한 어머니는 바느질이 어느 한 곳이라도 잘못되면 모두 뜯어 다시 하게 했다. 그만큼 바느질에 관한 한 엄격한 분이었다.
둘째 스승은 침모였다. 성주 성밖에 살았던 침모는 연세가 있는 이름난 침모였다.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에 하루 종일 옷을 짓는 데만 열중했다. 김 명장은 "숯불을 피우고 천을 나르는 일 등 허드렛일을 하면서 침모로부터 옷 짓는 기술을 배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 침모 덕분에 김 명장은 16세 때 바느질 솜씨를 인정받아 까다로운 아버지 옷을 짓는 데도 참여했다.
셋째 스승은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의 며느리 손응교 여사다. 손 여사는 바느질에 관한 기술적인 면보다는 옷을 짓는 데 대한 바른 마음과 정신을 주신 분이다. 손 여사는 6'25전쟁 때 피란 갔던 외가에서 처음 만났다. "전쟁 때여서 손 여사 역시 우리 외가로 피란 왔다. 우리 식구는 몸채에서 생활했고, 손 여사는 사랑채에서 기거했다. 그 사이 내왕할 수 있는 중문이 있었는데, 나는 그 문을 통해 자주 드나들면서 손 여사와 함께 옷을 짓곤 했습니다."
전쟁 후 어느 날 손 여사 집에 갔다. 손 여사는 김 명장에게 수의(壽衣)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수의를 지어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우리의 전통 수의가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으니 앞으로 전통 수의가 없어질 것을 염려해 수의 만드는 방법을 승계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수의는 시신을 싸는 천이다. 옷감도, 색깔도, 바느질도 중요하지 않다. 효심으로 지으면 된다"고 했다. 김 명장은 그 말을 듣고 수의에 대해 연구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수의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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