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새벽, 인적이 드문 언덕배기에 오른다. 어둠 속에서 바람이 분다. 소금기와 비린내가 서린, 섬(울릉도)에서 맞는 지극히 평범한 바람이다. 오래도록 동으로 트인 허공을 바라본다. 묵직하게 불어오는 저온의 바람을 맞으며 나는 해를 기다린다. 금방이라도 무엇인가가 툭 튀어오를 것만 같은 수평선을 따라, 날것의 붉은 기운이 얼비친다. 사위는 아직 어둑한데 아주 먼 곳에서부터 차분하게 밀려오는 아침놀은 숨이 막히도록 붉다.
해가 솟는다. 촘촘히 도열하는 빛이 눈부시다. 민낯을 물들이며 별 볼일 없는 무명의 한 사람을 도드라지게 비춘다. 까마득한 정적 속에 나는 혼자 서 있다. 온 세상이 질서 있게 눈을 뜬다. 주변 풍경이 선명해지고 새날을 맞는 섬 기슭 민가들이 두루두루 환하다. 빈부와 학식, 귀천의 차별 없이 상서로운 기운이 고르게 흩어진다. 무결하고 복된 새해 맞으라는 덕담들이 금빛 윤슬이 되어 바다에서 섬으로, 섬에서 바다로 뻗어간다.
지난한 시간, 아쉬움은 뒤로하고 이제 우리 넉넉히 행복하였으면 좋겠다. 냉기에 온몸이 얼었다 한들, 매일 새날을 부여받으며 우리 이 땅 위에서 대대로 평온하지 않았던가. 사람과 풍경이 어우러져 대대로 이토록 고왔으리라. 이 밝은 빛을 위안 삼아 서로 등줄기 기대고 힘차게 힘차게 일어서던 우리. 새날의 아침을 맞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빛은 참으로 공평하게 내린다. 질서 있게 세상을 비추는 이 평범한 빛들의 잔치, 남은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장엄한 희망이 되리라.
처음이다, 이런 느낌. 평생 잊지 못할 굉장한 오늘이다. 녹록지 않았던 날들이 저만치 멀어진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른다. 처음처럼 설레고, 마지막인 것처럼 못내 아쉬운 아침이다. 숨이 멎을 만큼 열정적으로 달려들어 뒤 돌아보지 않는 나의 오늘이 웅장하게 시작되고 있다. 큰 밝음을 향해 새로운 미지를 향해 육중한 열정으로 내달리는 나의 오늘들이 더 이상 무의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올해는 내 삶에 꽤 괜찮은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새해를 빌려 가장 '나'다운 삶의 전환을 꿈꿔본다. 설레고 새롭고, 아침 해처럼 가장 말간 영혼의 소유자이고 싶었다. 몇 해를 돌고 돌아 다시 꿈을 꾼다. 어렸을 적 출발선에서 신호음을 기다리며 긴장하던 천진한 꼬마는 벌써 마흔이 되었다. 정유년 아침, 마흔의 나는 다시 꼬마가 되어 '처음'을 위한 엄숙한 의식을 마치고 언 땅을 밟고 조심스레 언덕을 내려간다.
치부까지도 다 묻어줄 것 같은 눈부심, 밝게 떠오른 빛을 보며 처음으로 따뜻해지고 싶은 욕망을 품는다. 내려오는 길은 꽁꽁 얼었으나 바람 하나 없이 지극히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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