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내부에서 꿈틀대고 있는 변혁의 힘을 제대로 가늠하려면 좀 더 큰 세계의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분명 역사적 전환기에 처해 있다. 이제까지 세계 질서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던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뿌리째 흔들리고, 이 가치의 실현과 지속가능성을 보장한다고 여겼던 민주주의 선진국조차 커다란 시련을 겪고 있다. 민주주의 보루로 여겨졌던 서구의 정치를 불확실성의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전 세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 때 마르크스가 지칭하였던 '공산주의의 유령'은 결코 아니다. 이 유령이 살아나지 않도록 서구의 선진국은 민주적 가치를 중심으로 연합하고 동맹을 맺지 않았던가? 역사의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 떠돌고 있는 유령은 바로 어느 누구도 쉽게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파시즘'이다.
누가 '파시즘의 유령'을 다시 호출하였는가? 21세기 첫 10여 년 동안은 세계화의 명암을 온몸으로 겪은 시대였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하나의 자본주의 시장으로 만든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실질적으로 '경제적 세계화' 시대였다. 그렇지만 인종과 종교, 국가와 문화에 상관없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지구공동체로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은 헛된 망상으로 밝혀졌다. 국내에서는 사회 계층 간,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국가 간 격차를 크게 벌린 양극화는 신자유주의의 병리현상이었다. 남북 갈등, 새로운 빈곤, 그리고 테러리즘은 지금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파시즘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미국의 트럼프,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 어디 그뿐인가? 유럽에서는 곳곳에서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21세기의 첫 10년이 '경제 우선의 시대'였다면,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이 적나라하게 표출된 지금은 소위 푸틴, 시진핑, 트럼프와 같은 스트롱맨이 전면에 나서는 '정치 우선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폐쇄적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으로 무장한 새로운 파시즘이 신자유주의 무덤 위에서 춤추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바라보면 1천만여 명의 시민을 광장으로 이끈 촛불시위의 의미가 더욱더 도드라져 보인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도화선이 된 촛불시위는 제도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시민들의 분노 표출이었다. 우리 사회의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예사로 외치던 대통령이 적폐의 결정판이 되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가치가 여전히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준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으로 뛰어나간 것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자신의 삶을 시작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양극화의 병리적 현상에 분노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민주화 운동을 통해 얻은 '민주적 가치'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끓어오르는 분노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에 끝까지 충실하면서 비폭력적으로 촛불시위를 이어온 역사적 장면의 원동력이다.
전 세계적으로 '파시즘의 유령'이 떠돌고 있는 역사적 배경에서 촛불시위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촛불시위로 축적되고 표출된 변혁의 힘은 박정희와 박근혜로 대변되는 독재 문화적 잔재를 역사의 무덤으로 보내고 동시에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밝혀준다. 물론 개발독재를 동반한 '압축성장'은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식민통치를 경험한 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정도로 발전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또한 우리처럼 국민들 자력으로 민주화를 이룩하고 동시에 이 정도의 민주적 자의식을 발전시킨 나라도 드물다. 자긍심을 갖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유일한 대안일 뿐만 아니라 국가경쟁력의 토대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대통령 당선인 트럼프가 서구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수호자 역할을 포기함으로써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단결, 개방, 우리의 민주주의, 그리고 모든 사람의 복지에 기여하는 강력한 경제"만이 독일의 미래를 밝혀줄 것이라고. 우리도 민주주의 가치를 삶을 통해 실현하는 문화민주주의만이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찾아야 할 길이다.
우리가 진정 더 나은 사회를 원한다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정계가 개편되고, 또는 개헌이 이루어진다고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한결같이 '리셋 코리아'를 외치면서 제도개혁만을 주장한다. 그러나 문화의 리셋 없이는 그저 외모와 외관의 변화일 뿐이다. 우리 삶과 사회의 속까지 개혁하기 위해선 민주적 가치를 삶과 행위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원인이 '불통'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다른 사람도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평등주의에 입각해서 자기표현의 자유를 존중하고 이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성을 실천하면, 우리는 모두 민주적 가치를 중심으로 연대하고 단결할 것이다. 이렇게 실현된 민주적 가치는 새로운 국가경쟁력의 굳건한 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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