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15일 '대경스토리텔링협회'(회장 이연주)를 법인 등록하고, 활동을 시작한 대구경북의 소설가와 수필가, 대학교수들이 함께 '제1회 대경스토리텔링 작품선집'을 펴냈다. 회원 14명 중 11명이 대구경북의 역사'전설'인물'명소'음식 이야기를 발굴하거나, 재미가 덜했던 이야기에 씨줄과 날줄을 더해 흥미로운 이야기로 재가공했다.
소설가인 박희섭 회원은 "예술 행위는 평범한 것을 특별한 사연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스토리텔링 또한 그런 작업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던, 혹은 우리 눈에 띄지 않았던 옛 사람들의 발자취'숨결'정신과 사연을 찾아내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다. 더 건강하고 풍성한 식단(삶)을 구성하기 위해 새로운 반찬을 만드는 작업인 셈이다"고 말한다.
◆돌을 '할매'라고 부르는 까닭
영천에 가면 돌할매가 있다.(경북 영천시 북안면 돌할매로 484)
이 돌은 무게 약 10㎏, 직경 25㎝의 화강암이다. 그 모습을 그대로 평가하자면 그저 둥근 화강암에 불과하다. 그러나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임박할 즈음이면 하루 1천 명 이상이 이 돌을 찾아온다. 그냥 돌이 아니라 '사연'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화강암이 운세를 알려준다고 해서 '돌할매'라고 부른다. 무게 10㎏, 웬만한 성인이라면 이 돌을 들어 올릴 수 있다. 실제로 별생각 없이 돌을 들면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다. 그런데 생년월일과 주소, 나이, 성명 등을 말하고 소원이나 애로사항을 이야기한 다음 시도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돌을 들어 올릴 수도 있고, 못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돌이 쉽게 들리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돌이 들리지 않거나 몹시 힘겹게 들어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1548년부터 이 돌을 찾아가 마을의 길흉화복을 점쳤다. 또 마을에 전염병이 돌거나 흉사가 생기면 '돌할매 다지러 간다'며 참배를 했고 매월 음력 보름이 되면 동민제(洞民祭)를 지내왔다고 한다.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평범한 '돌'은 '할머니'가 되었다.
◆스토리텔링은 벌초 작업
대경스토리텔링협회 이연주 회장은 "스토리텔링은 '벌초' 작업과 닮았다. 그대로 두면 비바람에 스러지고, 풀이 자라 눈과 기억에서 사라질 무덤을 매년 벌초하는 까닭은 무덤을 보존함으로써 조상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고, 후대에 선대의 삶과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스토리텔링도 마찬가지다. 방치하면 세월을 따라 잊히고 결국은 무(無)가 될지도 모를 소중한 가치를 지켜가는 행위다"고 말한다. 모든 과거를 기억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과거를 잊어서도 안 된다. 과거를 기억할 수 있었기에 인류는 오늘날의 인류가 될 수 있었다.
이 회장은 또 "역사적 기록과 스토리텔링의 큰 차이점은 '역사 기록이 사람살이의 뼈와 살을 보존하는 행위라면, 스토리텔링은 거기에 피를 돌게 함으로써 과거를 현재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는 지식에 불과할 수 있으나 스토리텔링은 지식을 생활로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역사 왜곡하지 않는 절제 필요
스토리텔링은 '한 컷의 필름을 확장해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풍부한 상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상상의 색을 입히는 과정에서 자칫 본질을 왜곡하고, 엉뚱한 길로 빠질 우려가 있다.
대경스토리텔링협회 회원들은 "스토리텔링 작업은 징검다리 사이 사이에 빠진 징검다리 돌을 채워 넣는 작업이다. 기록으로 혹은 설화로 전해오는 '징검다리'에서 빠진 돌을 보태는 것이지, 징검다리가 향하는 방향 자체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자유롭게 상상하되, 상상으로 생겨난 것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전체적으로 살피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흔히 작가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욕심에 엉뚱한 이야기를 만드는 우(愚)를 범하기도 한다. 대경스토리텔링협회 회원들은 "여러 회원들이 함께 작업하니 그런 위험을 점검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전에 회원들이 서로의 작품을 읽으며 토론을 거치니, 엉뚱한 길로 빠질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말이었다.
◆스토리텔링협회가 하는 일
대경스토리텔링협회는 스토리와 콘텐츠 발굴, 집필 사업을 근간으로 공연물 및 창작품의 문화상품화, 랜드마크와 지역 축제 등 공공 스토리텔링 사업, 지역 이야기와 문화 관광 스토리 연계 작업, 스토리 원형의 집적화 사업, 스토리텔링 아카데미 사업 등을 펼친다.
박희섭 회원은 "왜 우리는 어느 관광지를 가나 비슷한 관광 상품밖에 볼 수가 없는가? 제주도가 아닌데도 관광지마다 돌하르방을 흔히 볼 수 있고, 사찰과 관련한 특별한 사연이 없는데도 부처님 기념품을 판매한다. 어디를 가나 부채, 염주, 삿갓, 지팡이, 약주 등 엇비슷한 상품대에 진열돼 있다. 그 장소,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는 "수만년 세월 한반도 곳곳에 사람이 살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오랜 세월을 살았는데, 거기 사연이 없을 리 없다. 다만 우리는 사연들을 기록하지 못했고, 전승하지 못했다. 지금부터라도 그런 작업을 충실히 수행하자는 것이 우리가 뭉친 이유다. 세련된 기술의 결과물이 아니라 이야기가 있는 기념품을 만드는 것이 우리 작업의 목표다"고 말한다.
◆어째서 남의 이야기를 쓰는가
작가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상상의 산물인 창작품을 내놓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토리텔링협회는 전해오는 이야기, 명승지, 인물 등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입힌다. 오롯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나, 상상력의 결정체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굴하거나, 색깔을 입혀 눈에 쉽게 띄도록 하는 작업을 행하는 것이다.
소설가 임수진 회원은 "내 이야기를 쓰는 일 못지않게 우리 공동체 전체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거기에 색깔을 입히는 작업이 중요하다. 내가 쓰는 소설이 나 한 사람의 '우주'를 드러내는 작업이라면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색을 입히는 작업은 우리 민족, 우리 공동체 모두의 '우주'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소설가로서 나만의 소설과 함께 우리 모두의 '이야기'도 쓰는 일은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고 말한다.
◆팔공산'자갈마당 이야기 채록
박희섭 회원은 "앞으로 팔공산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이야기 길'을 만들 것이다. 나무 이야기, 사찰 이야기, 홀로 출가의 길을 걸어갔던 남자의 이야기 등 팔공산 골골에 스며든 이야기를 발굴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대구 자갈마당은 대구 근대 역사의 회한을 간직한 곳이다. 수많은 여인들과 노동자들의 사연이 있는 곳이자,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하면서 만든 역사의 상처이기도 하다. 우리는 상처를 모두 걷어 내거나 흉터를 지우려고 들지 않는다. 흉터는 과거 어떤 특별했던 날을 증언하는 명확하고 간곡한 목소리다. 우리는 그 목소리들을 채록하고, 그 목소리에 확성기를 달아 세상을 향해 들려줄 생각이다"고 말했다. 훗날, 대구 '자갈마당'은 세월과 함께 우리 곁에서 떠날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사람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의 삶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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