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 사회를 좀먹던 불법과 편법, 부정과 부조리 앞에서 타협과 침묵을 강요당하던 이들이 천만의 촛불과 더불어 비로소 입을 열고 있다. 사사로운 욕망으로 공동체를 뿌리부터 뒤흔들던 거악을 척결하라는 목소리다. 신학적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한마디씩 던지고 있는 셈이다. 유신 시절이나 군부 독재 시절에 얻어터지고 붙잡혀 가면서 외치던 격한 구호에는 비할 바 아니지만, 어쨌거나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인지라 날카롭게 날이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어지간하면 눙치고 넘어가길 바라는 이들의 귀에는 가시요 서릿발일 테지만, 촛불로 표출되는 명백한 도덕적 요구는 혹시 있을 수도 있는 이견을 압도한다. 진실과 정의라는 거대한 명분 앞에 어찌 다른 말을 할 수 있으리오.
예수 그리스도가 본격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던 2천여 년 전의 이스라엘도 그랬다. 불의와 부정의 수레바퀴를 멈추라고 한 사내가 광야에서 외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세례자 요한. 낙타 가죽으로 해 입은 거친 옷과 벌꿀과 메뚜기로 연명하는 그의 삶은 어떠한 사심도 없는 도덕적 모범의 표상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 대신 약삭빠른 처세술만 만지작거리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벼락같은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시원한 물줄기로 켜켜이 묵은 먼지를 씻어 버리라는 그의 세례가 성황을 이룬 것은 그만큼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갈증이 심했다는 방증이다. 요한은 바로 그 갈증에 호소했고, 그의 목소리는 누구도 함부로 대꾸할 수 없을 권위가 있었다. 심지어 당대의 권력자도 그를 쉽게 가두지 못할 만큼.
그런데 그 세례자 요한이 홀연히 나타난 한 사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세례를 받겠다고 찾아온 예수를 보자마자 요한은 이렇게 외친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이 이 어린양의 신발끈을 매어 드릴 자격조차 없노라고 한껏 자세를 낮춘다. 이상하다. 왜 하필 어린양인가? 세상의 악을 처단하고 묵은 관행을 척결하기 위해서는 호랑이의 포효와 불의를 꿰뚫어 보는 매의 눈이 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사자의 기세로 적을 제압하고 무소와 같은 뚝심으로 불의한 이들을 밀어내는 강력한 존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리 떼에 물어 뜯겨 상처가 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대한 앞발로 때려잡는 불곰의 전투력이 정의를 실현하는 데 더 어울리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린 양이라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린 양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는 존재를 뜻한다. 순정한 어린 양은 묵묵히 자신의 몸에 죄를 지고 속죄와 정화의 불 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을 울리는 포효 대신 가녀린 울음밖에 가지지 못한 어린 양이 피 끓는 열정으로 무장한 요한의 찬사를 받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남의 죄조차 제 어깨에 걸머지고 가는 저 순정한 존재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내재된 광폭한 야수성은 또 다른 야성만으로는 다스려질 수 없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속죄와 평화를 가져오는 어린 양의 선함을 통해서야 새 하늘 새 땅이 열린다는 것이다.
몇 명의 거악을 처단하는 것만으로 정의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부정과 불의를 되갚아 주었을 때 실현되는 것은 복수와 보복이고, 이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힘의 각축과 물고 물리는 피의 싸움을 피할 길이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매일처럼 바라본다. '내 탓이오'라는 겸손한 고백, 그리고 함께 책임을 지려는 자세를 배우려는 까닭이다. 정의는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고도, 누군가에게 모든 탓을 돌려버리지 않고도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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