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나비를 보다

1990년 다시 학교를 다녔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바쁜 일정, 아르바이트, 공부 스트레스가 겹쳐 힘들면서도 힘이 솟던 시절이었다. 그해 목련이 화려하던 어느 봄날. 학교 강당에서는 그동안 여러 사람들의 뜻으로 정신대 관련 협의회가 만들어지고 이를 선언하는 행사가 열렸다. 우리 동기들은 합창으로 이 운동의 의미를 새겼다. 당시 하루하루는 요즘 하루하루와 닮았다. 자고 일어나면 상상을 초월하는 흑역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으니까. 엄연히 존재했으나 철저하게 외면당하던 것들, 후손에게 알려질까 더 은밀하게 폄하하던 것들이었다. 범죄 주체와 부역자들, 피해 참상과 당사자들이 드러나야 했다. 그리고 오랜 기간이 지난 만큼 사실의 은폐와 왜곡이 굳은살처럼 딱딱해졌겠으나, 진상 규명과 역사적 매듭이 풀릴 때까지 매진하겠다는 다짐이 주변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때 역사의 현장 언저리에 있었다.

1991년부터 시작된 '수요시위'에는 대여섯 번 참여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곧 신문지상으로 소식을 접하는 것 이외에는 나의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지 못한 채 세월이 그럭저럭 흘러가 버렸다. 위안부 할머니와 관련된 여러 정치'사회적 이슈를 접할 때에는 잠시 멈추어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싶은 한탄으로 안타까움의 예를 갖출 뿐이었다. 위안부 문제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2016년 12월 30일 부산에서는 일본 영사관 앞 소녀상을 철거했다가 도로 시민단체에 돌려주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아직 말이다.

몇 년 만에 광화문에 갔다. 촛불시위에 참여하러 간 건데, 평일이었고 마침 시위 장소가 여의도로 옮겨졌다는 말을 거기서 들었다. 힘이 쭉 빠졌다. 그렇지만 그곳을 이미 '필수 코스'처럼 여겨서인지 칼바람과 그녀가 세들어 있는 집을 바라보는 일은 참을 만했다. 옆으로 줄지어 있는 초라한 비닐 텐트들은 안쓰럽고 반가웠다. 그걸 보고 온 터였다. TV에서 일본 대사관 소녀상을 지키는 젊은이들이 이 추위에 비닐 텐트에서 버틴다는 소식을 전한다. 노란 나비 상징과 함께.

나는 맨날 돈벌이가 먼저고 내 식구 챙기기가 우선이고 내 한 몸 건사하기 바빠 저런 열정적이고 의미 있는 행동은 꿈도 못 꾼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대부분'에 편승해본다. 그러나 또한 대부분은 작금의 뉴스에 심장이 들끓고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지고 가슴이 옥죄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시작의 지점에 같이 서 있었기는 했으나 나는 그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다만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은 변함없다. 한 우물을 파면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에게 이 지면을 통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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