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 구구절절 우주적 광대함이 펄펄

관어대
관어대

◇꿈에 관어대에 올라

김시온

늙은 신선이 큰 바다를 뛰어넘네 老仙超大海(노선초대해)

그 신선 방호산을 양쪽 옆구리에 꼈네 兩腋挾方壺(양액협방호)

눈앞에 해가 지고 달이 다시 떠오르고 日月前呑吐(일월전탄토)

하늘과 땅 밖에는 아무것도 뵈지 않네 乾坤外有無(건곤외유무)

물속에 잠긴 자라를 하필이면 낚을 건가 鰲潛何必釣(오잠하필조)

요동을 치는 고래, 저놈을 잡아야지 鯨動此堪誅(경동차감주)

길게 휘파람 불며 푸른 허공 기대서니 長嘯倚空碧(장소의공벽)

힘차고 시원한 바람 사방에서 불어오네 雄風生四隅(웅풍생사우)

*원제: 夢登觀魚臺(몽등관어대). *관어대: 영덕 대진해수욕장 부근에 위치한 동해를 굽어보는 대. *방호산: 신선이 산다는 方丈山(방장산)의 별칭.

판서 이원정이 금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와서 아우인 참판 이원록에게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았다. "금강산에는 천하의 굉장한 구경거리가 다 모여 있다네. 그런데 아우, 자네는 평생 금강산 같은 굉장한 절경을 본 적이 있는가?" "형님, 형님께서는 금강산은 보셨지만 표은(瓢隱) 선생을 뵙지는 못했지요? 제가 선생을 뵈었더니, 덕이 넘쳐흐르는 모습과 그 당당한 풍채가 인간 세상 사람이 아니라, 틀림없이 신선 세계 사람이더군요. 그 거룩한 모습이 어찌 금강산 정도에서 그치겠습니까. 따라서 제가 뵈었던 표은 선생이 형님이 보셨다는 금강산보다 더 윗길이지요."

이 일화에 등장하는 조선 후기의 고매한 학자 표은 김시온(1598∼1669) 그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침략자 청나라와 맞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하고 있는데, 인조가 이미 무릎을 꿇었다는 비통한 소식이 들려왔다. 통곡을 하며 돌아와서, 세상에 대한 꿈을 접었다. 1644년 마침내 명나라가 멸망하자, 스스로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부르면서 첩첩 산 첩첩 골에 초당을 짓고 학문과 강학에 전념하였다.

숭정처사라?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 그러니까 천하가 이미 청나라의 천하가 되고 말았지만, 자신은 오랑캐 청나라의 처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명나라의 처사라는 뜻이다. 그에게 조선은 명나라 하늘 아래 조선이었고, 명나라는 망해도 망하지 않은 나라였다. 중국 중심의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에 갇힌 선비, 시대의 변화를 모르는 앞뒤가 꽉 막힌 아주 답답한 선비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 자체가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현재를 기준으로 하여 과거를 판단한 데서 오는 지나친 편견일 수도 있다.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그 당시로 돌아가서 보면, 그는 남다른 지조를 가진 참으로 의연하고도 명망 높은 선비로 존경을 한몸에 받았으니까.

인용한 시는 표은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꿈속에서 관어대에 올라 지었다는 시다. 보다시피 작중 화자는 양쪽 겨드랑이에 방호산을 냅다 끼고 바다를 뛰어넘는 신선을 본다. 그가 푸른 허공에다 몸을 기대고 한바탕 기나긴 휘파람을 불자, 힘차고 시원한 바람이 사방에서 들입다 휘몰아친다. 구절구절마다 우주적 광대함과 역동적 기상이 살아서 펄펄 뛰고 있다. 상쾌, 호쾌, 통쾌, 장쾌하다. 아마도 며칠 뒤에 있을 자신의 죽음을 선계(仙界)로의 비상(飛翔)으로 설정하고, 이토록 웅대하게 포착했을 터다.

금강산보다도 더 거룩한 절경이라는 표은 선생 같은 어르신이 동네마다 한 분씩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이 금강산보다도 훨씬 더 빼어난 천하의 절경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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