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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는 신라인들의 '타임캡슐'…『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전상운'대담 신동원/사이언스북스 펴냄

이 책은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이 쓴 한국과학기술사 통사이다. 과학 기술사 연구 선구자이자 과학 문화재 연구 산증인인 전 전 총장의 60년 학문 인생을 되돌아보는 책이다.

서장 '역사로서의 한국 과학의 이해'를 시작으로 모두 6개 장, 32개 절로 구성된 이 책은 천문학, 기상학, 물리학과 물리 기술, 화학과 응용 화학, 지리학과 지도 등 한국 과학 기술사의 전 시대, 전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등 조선 왕조의 궁궐에서부터 전국 방방곡곡에 숨어 있던 과학 유물들의 과학 기술적 작동 원리와 구조를 치밀하게, 과학적으로 분석해 내고, 그 과학 기술사적 가치를 되찾아 과학 기술이 한국에서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는지를 보여 주는 과학 문화재로 당당하게 되살려냈다.

그는 과학사에 뛰어든 계기를 홍이섭의 '조선과학사'의 충격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해시계, 자격루, 측우기에 대한 평가가 그를 놀라게 했던 것.

저자는 "196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는 전쟁과 혁명, 그리고 군사정변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완전히 수습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고 말하고 "일제강점기 때 어렵사리 보존되던 궁중 유물들 중 많은 것들이 전쟁 등의 혼란 통에 소실(燒失)되거나 도난당했고, 그나마 남아 있던 것들도 지키는 이 없이 잊혀 갔다"고 말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새 나라 개창의 자부심을 담아 만들었던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창경원이라는 이름으로 격하됐던 창경궁의 한구석에 엎어진 채 아이들의 놀이터나 가족의 식탁으로 전락했고, 장영실의 놀라운 발명품이었던 자격루는 자동으로 종과 북을 쳐 시각을 알리는 자격 장치는 사라진 채 덕수궁 한쪽에 처박혀 있었다.

저자는 '한국 과학 기술사' 출간 이후 50년간 과학 기술사 연구, 과학 문화재 보전 및 복원에 지대한 역할을 해 왔다. 1974년에는 세계적인 중국 과학사 권위자 네이선 시빈의 편집으로 MIT 출판부에서 '한국 과학 기술사'를 영역 출간해, 한국 과학 기술사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고,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대작으로 유명한 영국의 과학사 학자 조지프 니덤, 일본 교토 대학교의 과학사 학자 야부우치 기요시 등과 함께 국제 동아시아 과학사 회의를 조직했다.

저자는 문헌 연구에 멈추지 않고 실증적 연구에도 몰두했다. 경주 첨성대가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이고, 측우기가 세계 최초의 우량계라고 주장만 하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첨성대에서 어떤 식으로 관측을 했는지, 그 관측이 천문학적으로 유의미한지, 또 측우기의 강우량 계측이 어떤 식으로 정부 정책에 반영됐는지 실증적으로, 문헌 증거를 바탕으로 연구했다. 구체적 증거를 찾아내고자 전국 방방곡곡을 자와 카메라를 들고 누비고 다닌 한 학자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과 고궁박물관에서 인류 문명사적 과학 문화재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첨성대가 천문대임을 확인한 남천우가 밤에 몰래 첨성대에 올라가 별을 관측한 적이 있는데 이를 도와준 이가 정양모 당시 경주박물관장이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담고 있다.

특히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생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당시 출토된 1만8천여 점의 유물들은 1천 년 전 신라인의 생활도구인 동시에 당시 경주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타임캡슐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학문적으로 제대로 규정조차 되지 못했던 고구려, 백제, 가야의 과학 기술사를 다룬 3부 '장대한 고구려의 과학 문화재' 4부 '고대의 철의 과학' 5부 '백제, 잊혀진 과학 왕국'에서는 고대 한국의 과학 기술사를 동아시아 과학 기술사로 확대하는 장대한 전망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 곳곳에 숨어 있는 흔적들에서 고구려의 과학 기술을 읽어 내고, 일본까지 흘러간 가야와 백제의 철기 유물에서 고대의 철 기술을 찾아내고, 일본 교토와 나라의 청동대불과 거대한 불탑들에서 고대 백제의 요업 기술과 수학, 그리고 건축술을 읽어 내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일본의 불탑들과 문헌들을 한국 과학 기술사의 편린을 간접적으로라도 보여 주는 우리의 과학 문화재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752쪽, 3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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