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칼럼] 보수의 상징, 보수의 걸림돌

2018년 2월 어느 날. "국민 행복 시대를 열고 100%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지난 5년간 저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한마음이 되어 주신 국민 여러분 고맙습니다." 퇴임을 앞둔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인사 장면을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 상상해 봤다.

지난 10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라는 퇴임 연설을 보고 너무너무 부러워서 그랬다. 이날 청중들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수십 번 기립박수를 보냈다.

우리 국민들도 5년 전 당선 인사와 취임사를 떠올리며, 함께해 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박 대통령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박 대통령은 내년이 아니라 올해, 시기를 특정지을 수는 없지만 '타의'에 의해 청와대를 떠나야 할지 모른다. 탄핵돼 임기를 중간에 그만두어야 하는 첫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들 한다. 손수건으로,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시위대의 구호와 피켓이 그 자리를 대신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어찌 됐든 박 대통령이야 그렇게 청와대를 떠나 전직 대통령이 되면 그만이다. 그의 비극은 거기까지다. 법적인 부분은 그 뒤의 일이고 또 사법부의 몫이다.

정작 더 걱정되는 건 길 잃은 보수다. 새누리당 고수파나 바른정당 창당파, 아니면 친박 내지 진박파를 포함한 자칭타칭 보수파들이다. 4년 전 박 대통령을 보수의 아이콘이라며 지지를 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코앞에 대선이 다가왔다는데 마음을 주고, 표를 찍을 데가 없다고 하소연이다.

박 대통령을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종북 좌익,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욕하던 박사모와 유사단체 등의 위기감은 더하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박 대통령을 하늘이 내려준 천사라고 할 정도이니 그럴만도 하다. 촛불집회에 맞서 태극기를 흔들며 탄핵 무효를 외친다. 이들 역시 대선만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온건이든 극단이든, 참보수든 가짜 보수든 보수 진영 전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선장 불신임 과정 중이니 드러내놓고 새 선장을 뽑거나 영입할 수도 없다. 선장 친위 세력들도 아직 건재해 다음 행보를 더디게 만들고 있다. 선장의 입장 표명이 없이는 불신임에 대한 결론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야당 후보들은 저만치 앞서 가는데 여권, 보수 진영의 주자들은 잘 보이지 않는 이유다.

명색이 여권인데 인물이 없을 리 없다. 야권과 비교해서 인물 대결에서만큼은 못하지도 않다. 다만 시대적 여건이, 주변 인적'물적 환경이 열악하다. '박근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으니 눈치가 보여 치고 나오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된다. 권한정지 됐다고는 해도 현직 대통령의 영향력이 작지 않아 늘 신경이 쓰인다. 그래선지 최순실 사태로 국민 정서상, 선거 전략상 '박근혜 격하'라도 외치고 나서야 할 판인데 시간만 축낼 뿐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박 대통령 측의 자세는 불변이다. 특히 탄핵 심리 중인 헌법재판소에서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혀를 차게 한다. 비협조 아니면 시간 끌기다. 중동의 '침대 축구'마저 연상시킨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대국민 담화 내용은 '쇼'였나?

나라 전체로는 탄핵보다 더 큰 이벤트가 대선이다. 야당과 진보 진영에서는 준비운동도 다 하고 자신감에 차 스타트라인에 서 있다. 반면 새누리당과 보수 진영은 종아리 양쪽에 탄핵과 내분이라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려야 할 판이다. 그나마 뛸 선수도 못 찾고 있는 형국이다.

새누리당이 죽어야 보수가 산다고 하니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하는데, 답답할뿐이다. 덧칠도 못하고 리모델링에도 나설 수 없는 보수 진영이다.

박 대통령이 보수의 발목을 잡고 있다. 보수의 상징이 보수의 걸림돌이 돼 버린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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