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5일장의 추억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5일장이라고 하면 흔히 시골장을 떠올린다. 우리나라 5일장은 조선시대의 장시(場市)에서 그 역사를 찾을 수 있는데, 장시는 주로 보부상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품을 매매하던 정기 시장이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장시는 농민, 수공업자, 어민 등 직접 생산자들이 일정한 날짜와 장소에서 서로 물품을 교환하고 매매하는 시장이 됐다. 그래서 큰 고을이었던 지금의 시'군청 소재지에서는 보통 숫자 2와 7이 끝에 붙는 날짜에 장이 섰고, 주변 읍'면에서는 3/8, 4/9, 5/10일에 장이 서게 되었다. 보부상들은 멀리 타 지역에서 대량으로 구입한 물건을 주막에서 묵으며 며칠 동안 판매하고 돌아가곤 했다. 한 예로 충청도 금산장의 인삼이 경상도 영천 일대 시장으로 유통된 것은 이들의 역할 덕분이었다.

장날 아침에는 읍내로 가는 버스를 타기조차 힘들었다. 장에 가면 지금의 박람회처럼 신기하고 새로운 물건을 접할 수 있었다. 멀리 타지에서만 생산되는 상품을 구입할 수 있었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신제품도 경험할 수 있었다. 장날에는 평소 기회가 없어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여러 가지 음식도 맛볼 수 있었다. 요즘 열리는 음식 전시회에서처럼 먹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5일장은 문화 향유의 장이기도 했다. 읽어보고 싶었던 책을 구입할 수 있었고, 길거리 화가의 그림 솜씨를 감상하고, 광대놀이나 품바 공연도 공짜로 볼 수 있었다. 장은 문화와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5일장은 만남과 정보를 주고받는 기회도 제공했다. 장터에서 인편으로 멀리 시집간 누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친정아버지 환갑잔치가 열린다는 소식을 사돈집에 전해주는 것처럼 먼 친척 및 친지들과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었으며,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하거나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5일장은 굳이 살 것과 팔 것이 없어도 국밥에 막걸리 한잔하고, 오랜만에 친지를 만날 생각에 기대감을 갖고, 이것저것 구경하며 얻는 설렘으로 하루를 보내려는 사람들로 종일 북적였다. 이처럼 장은 경제활동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날이 끝이 나면 다음 장날만 기다렸다.

다품종 대량 판매를 하는 대형마트가 유행하며 전통시장은 점차 위축되고 있다. 더구나 스마트폰 같은 비대면적인 기기와 장치를 써서 더 빠르고 편리하게 정확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시대가 되기도 했다. 5일장의 1차적 기능인 경제적 기능은 아직 남아있지만, 대면 접촉으로 이뤄졌던 사회문화적 정취의 나눔은 사라지고 있다. 5일장이 그립고 아쉬울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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