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지게 가난했던 60·70년대 독일로
1.5㎞ 지하 탄광서 눈물나도록 고생
죽은 동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아파
고국 그리워 돌아왔지만 매정한 현실
회비 1만원 없어 모임 참석 못하기도
국민소득이 68달러인 시절이었다. 역사 교과서는 당시의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로 소개한다. 지금의 어르신들은 대한민국이 반세기 만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는 격변의 시대를 경험했다. 유례없는 경제 성장기에 '라인강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바로 파독 광부들이다. 파독 광부들은 한국인은 위기 때마다 이를 극복하고 기회로 만드는 저력이 있다고 말한다. 국민들이 현재 대한민국을 만든 과거를 알고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한다면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릭 아우프!(Glueck Auf'살아서 돌아오라)
"그땐 아침인사가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이었어요. 1.5㎞ 지하 탄광은 35℃로 후끈한데 열을 빼내기 위해 지상에서 공기를 쏴 줘요. 그 바람 때문에 석탄가루가 날리면서 종일 석탄을 마시고 뒤집어쓰는 거지."
조충래(81) 씨는 1964년 파독 광부 1차 3진으로 독일에 갔다. 대구 신명여고에서 서무 업무를 하던 조 씨는 독일에 가면 15배나 높은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파독 광부에 지원했다. 그 월급 덕분에 한국에 있던 가족은 굶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를 떠올리면 끔찍한 일이 가득하다. 조 씨에게 독일은 천국이기도 하고 지옥이기도 했다. 처음 광산에서 일할 당시에는 말로 다 표현 못 할 정도로 고생이 심했다. 독일인들은 절대 임금을 체불하는 경우가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1971년 독일 광산으로 간 최도석(73) 씨는 타지에서 죽어나간 동료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아픈 동료가 치료받을 방법이 없어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을 때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고 말했다. 어느 날 동료가 배가 아파 검진을 받았다. 독일 의사들은 2달 동안 병명을 못 찾다가 결국 간암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한국인 광부들은 높은 수준의 급여를 받았지만 대부분 한국으로 송금했다. 독일 현지 물가가 높아 파독 광부들의 생활수준은 매우 낮았다. 최 씨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어느 여름날 한국 광부들은 수영을 하고 싶었지만 수영장에 가지 못했다. 고국의 가족들이 눈에 어른거려 입장료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광부들끼리 강에서 공짜 수영을 즐겼다. "그런데 한 친구가 보이질 않았어요. 나중에 익사한 걸 건져냈지"라는 최 씨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독일 정착과 귀국의 기로에서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대가로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차관을 받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전 국민들이 외치던 '잘살아 보세'는 현실이 됐다. 하지만 많은 파독 광부는 돈을 많이 모아 귀국하지 못했다.
"한국에 남은 친구들이 더 잘 살아요."
광부로 간 사람들은 두 종류이다. 대부분이 찢어지도록 가난해서 돈 벌러 간 사람들과 해외 유학을 가려고 지원한 고학력자들이다. 최 씨는 "공부하러 간 사람들은 돈을 모아 미국으로 갔지만 나같이 가난한 사람은 한국 가족들 건사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버텼다"고 했다.
계약 기간 3년이 지난 파독 광부들은 독일 잔류나 귀국을 결정해야 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은 너무 가난했고 일자리가 적었다. 대부분의 광부는 현지에 남아 계속 일하기를 원했다. 반면 귀국을 결심한 사람들은 독일이 좋기는 하지만 고국이 그리워 돌아온 사람들이다.
김종천(81) 씨는 향수병에다 우울증이 겹쳐 몇 번이나 라인강에 뛰어들 생각을 했다. 김 씨는 죽더라도 고국에서 눈을 감아야겠다는 생각에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귀국 후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한국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사업에 실패해 독일에서 모은 재산을 모두 잃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 피해를 입기도 했다.
격변의 시기, 파독 광부들이 새로운 한국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탄광에서 지병을 얻어온 광부들은 역차별을 받기도 했다. 최도석 씨는 독일에 다녀온 뒤 진폐증(폐에 먼지가 쌓여 생기는 직업병) 진단을 받았지만 정부로부터 한 푼의 지원도 받지 못했다. 파병 군인들은 국가유공자로 지정돼 의료 지원을 받지만 파독 광부들에게는 지원이 안된다. 실제로 최 씨는 탄광촌 직업병 환자를 지원하는 센터를 방문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독일에서 병을 얻어온 사람은 지원 대상이 아니다"는 답변이었다. 최 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감사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대구에 살고 있는 파독 광부 40여 명은 매달 둘째 주 수요일 대구시 서구에 있는 사무실로 모인다. 이 사무실은 대구시에서 2015년 6월 파독 광부'간호사들을 위해 마련해 준 곳이다. 사무실이 생기기 전에는 회비를 거둬 식당에서 모였다. 회비 1만원이 없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충래 씨는 "대구시에서 사무실을 임대해 준 덕분에 지역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 모임을 지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파독 광부들은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긴 만큼 젊은 세대들에게 파독 광부들의 애국심과 애환을 알리는 강의도 준비하고 있다.
어수선하기만 한 2017년 대한민국의 현실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파독 광부들은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독 광부 경험은 역사이다. 국민들이 우리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되면 대한민국이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조 씨가 마지막으로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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