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미국 우선주의'를 천명해 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 공식 취임한 지 사흘 만에 환태평양경제동반협정(TPP) 탈퇴 계획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함에 따라 한국경제가 시험대에 올랐다. 우리 경제의 성장을 떠받쳐 온 지구촌의 자유무역 분위기가 트럼프발(發) 신(新)보호무역주의에 휘청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는 직격탄이다. 우리 경제는 지난 20여 년 동안 세계적인 개방경제 흐름에 맞춰 체질을 바꿔왔기 때문에 타격이 클 전망이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가운데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84.8%(2015년)다. 중국과 일본의 41.2%와 일본의 36.8%보다 훨씬 높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일성으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협상 결과에 따라 폐기도 가능)을 주장한 데 이어 24일에는 TPP 탈퇴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까지 흔들고 있어 자동차, 섬유, 전자, 철강 등 한미 FTA 수혜 업종이 주력산업인 지역 경제계가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보호무역주의 본격 가동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 시간으로 24일 새벽 자신의 대통령선거 공약대로 TPP 탈퇴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TPP는 미국, 일본, 멕시코, 싱가포르, 베트남 등 환태평양 12개국 간의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으로 무역장벽 철폐와 시장개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TPP가 미국의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취임 첫날 탈퇴하겠다고 공언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집무실에서 TPP 탈퇴 계획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한 직후 "미국 근로자를 위해 아주 좋은 일"이라고 설명했다. TPP 협상이 무산되면 우리 중소기업이 동남아시아에서 생산한 물건을 미국에 수출할 때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이 '미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양자 무역협정 시대로 가고 있다"고 평가한 뒤 "이번 주 내에 무역과 관련된 행정명령이 추가로 나올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앞서 백악관은 21일 '트럼프 정부 6대 국정기조'를 발표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NAFTA의 재협상을 공약했다"며 "만약 우리의 파트너(국가)들이 미국 노동자들에게 공정한 재협상을 거부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NAFTA를 폐기하겠다는 의사를 통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NAFTA가 붕괴되면 인건비가 싼 멕시코에서 우리 기업이 생산한 자동차와 전자제품 등이 미국시장에서 관세혜택을 받지 못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후보시절 약속한 '각종 자유무역협정 폐기' 공약이 취임 후 현실로 나타남에 따라 한미 FTA가 다음 표적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한국은 전체 수출의 13.4%인 665억달러어치를 미국에 팔아 233억달러 규모의 흑자를 냈다. 미국으로선 얄미운 교역상대다. 미국의 견제는 진즉부터 시작됐다. 미국의 대(對)한국 보호무역 조치 건수는 2000~2008년 2천573건에서 2009~2016년 2천797건으로 증가했다.
◆ 한미 FTA 재협상 가능성 배제할 수 없어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노골적인 보호무역주의 행보를 보임에 따라 한미 FTA의 위상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미세조정 시도는 언제든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폐기 후 재협상' 수준의 극약처방은 미국도 부담스럽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다만, 취임 전부터 보여 온 트럼프 대통령의 돌출 행보를 고려하면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한미 FTA의 운명에 대해 다소 엇갈린 전망을 내놓고 있다.
문종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통상 관련 공약이 실행으로 옮겨지는 단계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될 TPP를 제외하면 한미 FTA가 재협상의 첫 번째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강한 경계심을 나타냈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매년 막대한 무역 이익을 챙겨가면서도 멕시코와 동남아시아 등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어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국가다. 안보상황 등을 지렛대로 활용할 경우 재협상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하기도 쉽기 때문에 트럼프 정부가 지지자들에게 즉각적인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한국을 가장 먼저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반면, 한미 FTA는 미국의 즉각적인 조치 대상이 아니라는 희망적인 분석도 있다. 매튜 굿맨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수석연구원은 "한미 FTA는 미국 선거 기간 트럼프 대통령의 타깃이 됐던 것이 사실이지만 재협상으로 가기에는 NAFTA 등에 비해 정책 우선순위가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한국은 아직 멕시코, 중국 등에 비해 미국 내수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는 판단이다. 대부분 전문가는 양 극단보다 미세조정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제현정 무역협회 통상협력실 차장은 "한미 FTA 협정 이행을 강조하면서 필요할 경우 압력의 강도를 높일 것"이라며 "법률시장 개방처럼 이행에 대한 시각차가 있는 경우 갈등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이 '폐기 후 전면 재협상' 가능성을 언급하며 공포감을 조성한 후 세부협상에서 실리를 챙길 것이라는 전망이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당장 한국에 큰 미국의 통상공세 압박이 밀려오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더라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한국경제
이와 함께 미국과 중국, G2의 무역 분쟁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두 강국 사이에서 한국경제가 등이 터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관세 인상으로 중국의 대미 수출이 10% 감소할 경우 한국의 중국 수출은 1.5% 감소한다고 예측했다. 지난해 한국의 대중 수출이 1천244억달러(약 146조2천900억원) 규모라는 점을 고려하면 18억7천만달러(약 2조1천991억원)가 줄어드는 셈이다. 중국의 피해가 한국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한국이 중간재 위주의 수출 구조를 가지고 있는 탓이다. 중국은 한국산 중간재를 수입해 완제품을 생산해 미국에 수출한다. 이로 인한 국내 피해는 중소기업에 집중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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