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배신자와 용기있는 자

'하인리히 법칙'은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 반드시 징후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법칙이다. 일명 '1:29:300 법칙'으로도 불린다. 하나의 대형 사건이 터지기 전에 29번의 경미한 사건이 발생하고, 300건의 잠재적 징후가 보인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수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역시 수많은 경고성 징후들과 전조들이 있었지만, 이들을 근거 없는 의혹 제기로 치부하다 보니 대한민국을 역대급 혼란으로 뒤흔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본격적인 게이트 보도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검찰 수사가 시작된 시점에서도 좀처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그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최순실을 위시한 권력의 부역자들은 부인이나 모르쇠로 버티거나 서로 말 맞추기를 통해 빠져나갈 기회만을 노렸다.

그런데 이런 시도를 보기 좋게 가로막은 이가 있었다. 내부 고발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노승일 전 K스포츠재단 부장이다. 독일 비덱스포츠 근무 시절부터 끈질기게 '자료'를 모아왔다는 노 전 부장은 작심한 듯 녹취록을 비롯해 자신이 아는 내부 정보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만약 이런 폭로가 없었다면 최순실 일가는 지금도 여전히 대통령의 권력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이용해 국가 재산을 사유화하는데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 중 우리 사회에 큰 파장과 변화를 몰고 온 사건 상당수는 한 사람의 용기 있는 목소리에서 출발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축소 조작, 2005년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논문 조작, 2007년 삼성 비자금 폭로에 이르기까지 공익 제보자들의 역할은 컸다. 지난 2002년부터 지금까지 국민권익위원회에 신고된 부정부패 중 절반이 내부 고발에 의해서이며, 이를 통해 추징할 수 있게 된 돈은 4천600억여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이들 내부 고발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올바른 목소리를 낸 이들은 조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배신자'라는 낙인과 함께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다. 노승일 전 부장 역시 벌써 누군가에게 미행을 당하고 악몽에 시달리고 있고, K스포츠재단의 정동춘 전 이사장으로부터 내부 징계를 받아야 했다. 호루라기재단 실태 조사에 따르면, 내부 고발자의 절반 이상이 제보 이후 1년 사이 자살 충동을 겪었고, 73%는 동료들로부터 집단 따돌림과 가정불화 등을 겪었다는 조사도 있다.

한국 사회는 유독 '정'(情)이 넘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게 좋다'는 온정주의로 흐를 때는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를 만연하게 하는 토양이 되고, 정의감으로 불이익을 감수하고 나선 공익 제보자들을 '배신자'로 보는 따가운 시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국가급 권력 스캔들이 아니라도 우리 주변에는 바로잡아야 할 크고 작은 불합리와 그들끼리의 담합,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가 차고 넘친다. 하인리히의 법칙처럼 수십 번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기회에 대한 위기 경보가 울리는 것을 목격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입을 열기가 힘들다. 바른 목소리를 내다가 '별난 놈, 까칠한 놈'으로 찍혀 피해당하기 싫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체념이 우리를 '좋은 게 좋다'는 분위기로 몰아간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되짚어보자. 과연 '좋은 게 좋다'는 타협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내가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가는 사이 기득권 누군가는 계속해서 악의 과실을 따 먹을 것이고, 누군가는 피해와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좋은 게 좋다'는 것이다. 곪을 때까지 곪은 뒤 터져 나온 문제는 조직 혹은 사회 전체의 손해로 돌아온다.

부디 정유년 새해에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할 말은 하고 사는 사회, 그리고 정의롭게 목소리를 낸 이들을 시민의 힘으로 지켜줄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게 우리 조직과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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