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9988! 빛나는 실버 S] 나눔을 실천하는 박병립 육주복지회 대표이사

"사회서 얻은 재산 모두 환원" 96세에 대중교통 이용

박병립 씨는 맨손으로 천억원대 자산을 일구었지만 자기 것이 아니라며 사회에 환원했다. 매일 아침 학교 교정을 쓸거나 조경 관리도 직접 하고 있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10대 되기 전부터 건축 기술 배워

20대에 2만석 부자…1천억 재산 모아

가난 때문에 못 배운 서러움 없애려

모은 돈으로 학교 건립, 6곳 운영

복지재단 위탁금 사익 위해 쓰지 않아

학교 교정 청소·조경 직접 관리

올해 대구시 '사랑의 온도탑'은 지난해보다 17일이나 빨리 목표를 달성했다. 익명의 키다리 아저씨 기부가 5년째 이어지는 등 어려운 시기에도 온정의 손길이 끊이지 않아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내 것을 남을 위해 내놓는 일이 뉴스에서 접하는 것처럼 흔한 일은 아니다. 박병립(96) 씨는 맨손으로 천억원대 자산을 일구었지만 자기 것이 아니라며 사회에 환원했다.

◆"예전에는 거창하게 봉사라고 하지 않았죠"

"내 것은 없어요. 전부 사회에 되돌려줄 것들입니다." 박병립 육주복지회 대표이사는 맨손으로 일군 재산을 사회복지사업에 사용하고 있다. 고생해 번 돈도 자신이 세운 복지재단도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했다. 사회에서 받았기 때문에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박 씨는 복지재단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지만 회사 차량이나 직원들을 절대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96세 노인이지만 수행원 없이 매일 아침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산에 있는 학교로 출근한다. 굳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남에게 부탁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했다.

1922년 달성군 다사면이 고향인 박 씨가 태어날 당시 집안의 가세는 많이 기운 상태였다. 박 씨의 집은 독실한 유교 집안이라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무 일이나 할 수 없었다. 박 씨의 아버지는 가족을 굶길 수 없어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하며 돈을 벌었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에 박 씨는 10대가 되기 전부터 아버지를 따라 건축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찍이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박 씨는 개인 사업에 뛰어들어 20대에 2만 석 부자가 됐다.

이때만 하더라도 돈이 있으면 이웃과 나누는 분위기였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대구로 피란 왔다. 전쟁 통에 집들은 아수라장이 됐고 추운 겨울에 다들 벌벌 떨었다. 기술을 가진 박 씨는 동네 전체를 돌며 남의 집 아궁이를 고쳐줬다. 남을 위한 박 씨의 첫 번째 봉사였다. 박 씨는 아궁이를 고치면서 보람을 느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많이 하겠다고 결심했다.

박 씨는 "옛날에는 옆집이 어려워 굶고 있으면 나눠 먹고 힘쓸 일이 있으면 돕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됐어요. 오히려 요즘 들어 그런 일들을 거창하게 기부나 복지로 소개하는 거지요"라며 요즘 세태를 한탄했다.

◆사회복지시설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휴전이 선포된 후 박 씨는 아내와 상경했다. 폐허가 된 서울은 건설업자가 필요했는데 박 씨는 미장업을, 아내는 식당을 운영해 돈을 모았다. 이번에도 모은 돈을 학교를 짓는 데 썼다. 박 씨가 학교를 지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가난 때문에 학교를 못 다닌 서러움을 후손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3년 인천에 부성중학교를 지은 것을 시작으로 72년 경산여고를 인수했고 현재는 6개 학교를 운영 중이다. 집이 멀어 학교에 올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통학버스를 운영했다.

경제 성장에 맞춰 공공교육이 자리 잡자 박 씨는 노인 복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박 씨는 50년간 아버지를 모시면서 언젠가 노인복지를 위해 일해야겠다고 항상 마음에 담아 왔다. 노인 문제는 결국 내 부모와 나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다. 특히 현시대의 노인들은 격변의 시대를 보내고 있어 사회적으로 겪는 갈등이 많다. 박 씨는 앞으로 노인이 될 사람들이 맞이할 사회도 예측할 수 없어 미리 준비해야 더 큰 문제를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앞으로 노인이 될 사람들이 무슨 고민이 있고 뭐가 필요할지 알 수 없어요. 다만 미리 준비하고 더 많은 노인을 수용할 수 있는 복지시설이 늘어나야 좀 더 빨리 파악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박 씨는 열심히 일해 모든 재산도, 아흔여섯 나이에 건강하게 사는 것도 세상에서 받은 것이기에 어떤 방법으로든 되돌려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 씨는 복지재단으로 사회 환원을 시작했다. 학교 운영이나 노인 복지를 통해 영리를 취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단을 운영하다 보면 사람과의 갈등은 생길 수 있지만 학생을 위해 쓸 돈을 아끼거나 허투루 쓰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재단에 위탁한 돈은 사익을 위해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박 씨의 원칙이다. 실제로 박 씨는 법인 차량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멀지 않은 길은 걸어다닌다. 학교 교정을 쓸거나 조경 관리도 직접 하고 있다. 1999년 개관한 동구노인종합복지관 건축 당시에도 직접 공사에 참여했다. 재단 대표이사 수행비서가 있지만 100세에 가까운 박 씨는 거추장스러움이 부담스럽다며 혼자 다닌다.

박 씨는 13세에 열병으로 청각장애를 얻어 말을 쉽게 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까지 모진 시대를 경험했지만, 박 씨는 오히려 열심히 사는 사람이 빛을 볼 수 있는 감사한 시기라고 회상했다. 노력하면 잘 살 수 있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시기였다. 박 씨는 장애가 생기는 어려움과 열심히 일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감사함을 동시에 경험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을 남들과 나누게 됐다.

"사회라는 공동체에 우리가 모여 사는 것은 서로가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면 건강한 육체든 돈이든 모두 나눠 써야 할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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